[횡설수설]민병욱/미국주의

  • 입력 2000년 11월 10일 18시 42분


미국의 대통령선거 결과가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말썽이 난 플로리다주 재검표에서 조지 W 부시, 앨 고어 후보간 표차가 200표대로 줄었다. 부재자 투표의 집계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섣불리 당선 판정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고어측은 부정선거 의혹과 관련한 소송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주의의 원조국가인 양 떠받들리던 미국이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선거관리 측면에서도 세계의 눈총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는 미국을 보는 우리 내부의 눈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졌다. 일각에서는 재검표 과정에서 미국민이나 후보들이 차분한 대응을 한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한 모습’이니 ‘민주국가의 대부다운 자세’ 등으로 한껏 추어올렸다. 표차가 워낙 근소할 경우 재검표를 하도록 못박은 법에 따라 재검표를 하는 것을 두고 ‘참 공정한 선거관리’라고 칭찬하는 모습도 보인다. 혼란이 계속 확산되는데도 “미국의 선거와 민주주의는 우리를 부럽게 만든다”고 말하는 이 또한 적지 않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와 부러움은 가실 것 같지 않다.

▷미국 대선 투표 직후 영국의 한 일간지는 “(미국의) 선거는 돈에 의해, 즉 부자들에 의해, 그리고 미디어 장악에 의해 판가름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들어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번 미국 선거에 든 돈은 대략 30억달러에 이른다. 후보들은 TV광고를 통해 상대의 약점을 끈질기게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대통령 후보는 선거전문가들의 철저한 지침으로 만들어진 상품처럼 움직였고 말실수를 우려해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게다가 그 많은 돈을 퍼부어 광고를 했는데도 투표율은 50%대에 머물렀다.

▷한국에서 이런 선거상황이 벌어졌으면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선거자금의 투명한 관리’니 ‘명쾌한 대선전략’, ‘훌륭한 제도와 투철한 준법선거’라는 좋은 점만 강조되곤 한다. 왜 그럴까. 우리 정치가 워낙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일 테지만 우리도 모르게 미국 제일주의에 빠져 그런 건 아닐까. 우리 것도 좋은 것은 칭찬하며 살아야겠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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