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화가와 북아트

  • 입력 2000년 11월 3일 18시 39분


오르세미술관 한국전 ‘인상파와 근대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말까지 계속될 예정인데, 폴 고갱(1848∼1903)의 작품도 2점 전시되고 있다.

폴 고갱은 북아트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두 달 여의 항해 끝에 그가 타히티에 도착한 1891년 6월 8일로부터 시작되는 책, ‘노아 노아’(Noa Noa)가 현대 북아트의 효시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가 타히티 생활을 담은 일기의 출간을 추진했지만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고, 결국 1893년에 자비로 출간한 것이 바로 ‘노아 노아’이다.

특히 이 책만을 위해 고갱이 제작한 목판화 10점이 실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는 ‘고갱의 타히티 기행’, ‘노아 노아’라는 제목으로 다른 두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

1889년에 개장하여 파리의 벨 에포크(황금기)를 대표하게 된 물랭루즈의 화가로 유명한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1864∼1901)도 북아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1896년에 한정판 100권이 출간된 쥘 르나르(1864∼1910)의 ‘Histoires Naturelles’(박물지)엔 로트렉이 파리 동물원에서 스케치한 석판화 작품 22점이 수록되어 있다. 이 동물 우화집이 역시 현대 북아트의 효시의 하나로 꼽힌다.

로트렉은 현대 판화 장르의 개척자로도 일컬어지는데,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도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그 내용은 모리스 라벨(1875∼1937)이 1906년에 작곡한 동명 피아노 가곡의 가사가 되기도 했다. 실로 문학, 미술, 음악을 넘나든 책인 셈이다.

쥘 르나르는 불우한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 소설 ‘홍당무’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제작되던 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 이후,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靈氣)를 상실하고 대량 생산,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

파일을 다운로드받게 되어 있는 최근의 e북은 책 한 권 한 권이 지닐 수 있는 유일무이의 위상을 더욱 심각하게 위협한다.

하나의 베스트셀러를 읽은 수백 만명의 독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같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책을 소유하는, 또는 읽는 순간부터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의 독자 사이에 오랜 사귐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사귐은 만지고 보듬고 던지거나 찢을 수 있는,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물건 하나와의 사귐이기도 하다.

북아트는 그러한 사귐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이 지니는 독자적인 위상과 의미, 가치를 보전할 수 있는 활동으로서, 북아트 장르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아쉽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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