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중국 산골 소녀의 사랑 이야기<집으로 가는 길>

  • 입력 2000년 10월 30일 15시 36분


장이모우 감독의 10대 시절은 펜이 독이 되는 시대였다. 문화혁명의 바람이 지식인들의 펜을 무참히 꺾어버렸던 그때, 아직 애송이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장이모우는 학교를 중단하고 산시성의 방직공장에서 10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카메라에 잡힌 세상 풍경이 좋아 감독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청년 시절 보았던 남루한 중국 서민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 <귀주 이야기>부터 <인생>에 이르기까지, 장이모우 감독의 시선은 중국의 봉건시대와 문화혁명기에서 떠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것은 비록 중국 6세대 감독들의 결기 어린 비판보다 무딘 시선이었지만, 그 영화들로 인해 중국 근대사는 비로소 서양인들의 머리 속에 뚜렷이 남게 됐다. 중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각광 받는 장이모우 감독은 50대에 접어든 지금 좀더 여유로운 시선으로 중국의 옛 시절을 돌아본다.

<집으로 가는 길>은 장이모우 감독이 문화혁명기 이전, '붓의 위엄'이 살아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써둔 일기장 같은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중국의 옛 시절을 혁명적인 어조로 반추하진 않는다. 장이모우 감독은 10대 소녀의 감상적인 일기장을 훔쳐보듯 경쾌한 리듬으로 중국 현대사를 각색하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쁜 소녀 쟈오 디(장지이). 그녀는 새로 부임한 20대 초반의 젊은 선생님 류어창위(청하오)에게 첫 눈에 반한다.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류어창위의 모습은 순진한 처녀의 마음을 붙잡기에 충분할 만큼 늠름했고, 게다가 그는 낭랑한 목소리와 선생님이라는 고귀한 직분까지 갖추고 있었다. 류어창위에게 반한 쟈오 디는 그날부터 그의 꽁무니를 쫓는 데 온 시간을 허비한다.

학교 주변에 있는 우물가로 물을 길러 다니고, 일부러 그가 걸어오는 길 저편에서 마주 보며 걸어오기를 몇 차례. 그녀의 풋풋한 사랑은 류어창위에게도 금세 전해지고, '자유연애'가 일반화되지 않을 무렵 두 사람의 사랑은 시골 마을에 신선한 소문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생각만큼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류어창위가 마을 교사로 부임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곧 도시로 떠나게 됐기 때문. 영화 속에선 비록 류어창위가 도시로 떠난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50년대 중국 현대사를 되짚어보면 답은 뻔하다. 그 당시는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던 암울한 시절. 소녀의 애간장을 다 녹인 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돌아온 그는, 소녀와의 사랑을 어렵게 완성한다. 붉은 머리핀과 깨진 그릇을 소중히 보관하며 사랑을 가꾸는 소녀의 심정은, 이 영화를 예쁜 멜로로 포장해주는 중심 축이다.

영화는 선생님과 시골 처녀가 엮어가는 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현재와 현재 사이에 가둔다. 현재의 에피소드 안에 갇힌 잊혀진 과거사를 새롭게 들추는 인물은, 이제 반백의 노파로 변한 시골 아낙네의 아들 류어위셩(순홍레이).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쟈오 디의 아들 류어위셩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향에 돌아온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고지순했던 사랑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부모님의 옛 사랑을 되짚어본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관을 걸어서 집까지 운반하는 것)하겠다고 우기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아들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하는 라스트 신이 흑백으로 처리되고, 과거의 이야기가 오히려 화려한 컬러로 처리됐다는 점이다. 이것은 장이모우 감독이 기억하는 옛날이 현재보다 훨씬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했기 때문일까. 풍요로운 현재보다 남루한 과거가 더 아름다웠다는 감독의 주장은 이런 몇 가지 장치 덕분에 영화 속에 잘 재현되어 있다.

탈색된 현재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눈물을 자아낼 만큼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가득차 있으며, 벗꽃잎처럼 흩날리는 눈보라와 황금빛 들녘이 매혹적인 중국의 50년대 풍경은 밝고 경쾌한 에피소드로 넘쳐난다.

자칫 누추해질 뻔한 러브 스토리에 활기를 더한 인물은 '리틀 공리'로 불리는 장지이다. 그녀는 첫사랑에 애가 타는 소녀의 심정을 능청맞을 정도로 예쁘게 소화해내 동양 여인의 미적 기준을 다시 썼다. <집으로 가는 길>은 장지이가 아니었다면 느낌이 50% 정도는 반감됐을 법한, 그녀만을 위한 영화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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