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월드]中, 6·25참전 환기시키며 애국 고취

  • 입력 2000년 10월 19일 19시 16분


《중국 정부가 6·25전쟁 참전 5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기념 열기를 북돋우고 있는 가운데 일반 국민 사이에 참전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중국에서 6·25전쟁은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으로 불린다.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중국군은 1950년 10월19일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은 첫 교전이 벌어진 10월25일을 공식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다》

5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최근 중국 언론들은 당시의 무용담과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 장면을 담은 화보 등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TV에서는 30부작 다큐멘터리 드라마 ‘조선전쟁’도 절찬리에 방영중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로 참전 초기에 전사한 마오안잉(毛岸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6·25전쟁에 관한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군사과학원 소속 현역 대령 2명을 초청, 인터넷으로 네티즌들과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인민일보는 이와 별도로 ‘항미원조전쟁 50주년 기념’ 코너를 홈페이지에 개설하고 6·25 관련 사진과 문서 900여건을 소개했다.

중국의 이같은 기념 열기는 25일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6·25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은 남북 화해를 위해 50주년 행사를 당초 계획보다 줄였다. 이런 마당에 중국이 참전 기념 열기를 고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국주의’ 고취를 통해 당과 군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일깨우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여년간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당과 군에 대한 신뢰가 끊임없이 실추돼 왔다. 특히 고위 간부들의 부정 부패가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다. 올들어 8월말까지 적발된 부패 사건만도 2만3000건에 이른다.

‘건국이래 최대’로 알려진 샤먼(厦門)밀수 스캔들도 재판중이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의 공직자가 법의 심판대에 올랐고 당 고위급 인사들이 연루돼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최근에는 당 이론지인 훙치(紅旗)출판사 사장도 부패 혐의로 구속됐다.

군에 대한 애정도 식었다. 샤먼밀수스캔들도 당과 정부, 군이 한통속이 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공산당 원로 지펑페이(姬鵬飛)의 아들인 현역 장성도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군 원로인 류화칭(劉華淸)의 며느리도 구속됐다. 또한 중국군은 89년 톈안먼(天安門)시위를 유혈 진압, ‘인민의 군대’란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중국이 애써 참전 50주년 열기를 고취하는 것은 과거 당과 군의 ‘희생’을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도부의 의도와는 달리 참전을 보는 ‘민심’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인터넷 토론사이트인 인민일보 ‘강국(强國)논단’에는 참전의 공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의 출병과 중국 출병의 차이점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지금까지 감춰 온 이유는?”

심지어 “북한이 이겼다면 한반도는 잘살게 됐을 것인가?” “그러면 중국―베트남 전쟁은 뭐냐” “지원군(중국군) 70%가 국민당에서 투항한 부대라는데 일거양득을 노린 것 아닌가” 등 신랄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은 그동안 6·25전쟁 참전을 “중국인민이 침략에 대항해 중국을 보위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펼친 정의의 전쟁”이라고 표현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공식 입장과는 달리 최근에는 새로운 관점이 태동하고 있다. 이른바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비난의 화살이 당과 정부, 군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 그 특징이다. 참전 50주년 기념 열기는 이같은 ‘라오바이싱’의 눈을 보다 더 정부 비판적인 방향으로 돌려세우고 있는 것이다.

▼6·25연구학자 선즈화씨▼

선즈화(沈志華·50)씨는 한국전쟁 연구에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재야사학자. 선씨는 그동안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98년), ‘중소동맹과 조선전쟁연구’(99년) 등 저서를 통해 한국전쟁을 재조명해왔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중국 당국의 공식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베이징(北京)에서는 판매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베이징 교외 자택에서 만난 선씨는 “중국은 북한의 남침에 줄곧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반대했다면 왜 참전했는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황에 변화가 생겼다. 북한은 정치국 회의를 열고 소련에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며, 중국에도 편지를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중국은 연합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반대한 이유는….

“중국은 당시 대만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제건설도 시급한 일이었다. 오랜 내전으로 인한 염전(厭戰)현상도 두드러졌다.”

―전쟁발발 전에 중국 체류 조선인부대를 북한에 돌려보내기도 했는데….

“49년 5월 북한이 특사를 보내 조선인부대를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이 물러간 마당에 중국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해 7월 선양(瀋陽)과 창춘(長春)에 있던 두 개 조선인사단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북한은 이듬해인 50년 1월 남은 부대를 모두 돌려보내줄 것을 다시 요청해왔다. 이에 어쩔 수 없이 4월 남은 부대를 모두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바로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 및 당시 참전결정의 실책 등을 고려해 한국전쟁에 대한 재조명을 피하고 있다”며 “참전으로 아무런 실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만 본 것이 중국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이종환특파원>ljh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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