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성기/"패러디는 빨래다"

  • 입력 2000년 10월 18일 18시 29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하니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고 되받았다. 이럴 때 흔히 썰렁하다거나 아니면 ‘쿨(cool)하다’고 한다. 전자의 발언에는 자못 비장함이 깔려 있는데, 그에 대해 짐짓 태연하게 “그래요, 침을 뱉도록 하죠” 하며 사오정처럼 대꾸하는 형국이다. 책제목으로 익히 알려진 그 둘의 관계는 요즘 부상하는 ‘안티’ 문화의 기본 구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패러디의 옷을 입고서 맞받아 치는 것 말이다.

패러디. 우리말로는 풍자하여 비꼬는 행위를 일컫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한 저항과 조롱의 의미를 지닌다. 한데 그것은 전통 민중문화에서 널리 통용되는 문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 곁에서 ‘양반인지 좆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라며 으르고 눙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긴 수염을 자랑하는 양반이 일순간에 볼품없는 소반으로 격하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 패러디를 통한 저항과 뒤집기 전략은 민중문화의 계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문화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아직은 별로 가진 게 없는, 그러나 할 말은 많고 또 하고 싶은 그런 세대가 아닌가. 무언가 자기를 억압하는 거대한 대상에 대해 저항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어법을 통해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이에 결정적인 촉매제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그 매체가 채널을 다양화하고 매체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일방적인 틀을 부수자마자 누구나 발신자 또는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를 웅변하는 사례가 우리에게 ‘부적절한 관계’라는 신조어를 선사했던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이다. 그 사건의 발단은 매트 드러지라는 인물이 인터넷 사이트에 백악관 견습사원이었던 르윈스키의 전화통화 내용을 ‘드러지 리포트’란 이름으로 처음 폭로한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패러디 안티 사이트의 원조로는 ‘딴지일보’가 손꼽힌다. 딴지일보는 조선일보를 희화화하며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기존 언론에 대한 반감을 패러디 형식으로 취한 그것은, 이제 그 자체가 딴죽걸기의 대상이 될 만큼 폭로 저널리즘으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누리기에 이르렀다. 이는 안티 사이트의 새로운 강자 자리를 겨냥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데서도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어쨌거나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민주화를 예감케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사이버 공간에 욕설과 언어폭력이 난무함으로써 이미 진정한 대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 같은 문제는 일단 과도기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 솔직히 골리앗다운 골리앗이 없던 탓에 자칫 서로간에 이전투구의 양상마저 드러내곤 하는데, 무엇보다 오늘의 다윗들은 스스로 골리앗이 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폭로 저널리즘의 향후 진로이다. 언론 매체 전반이 폭로 저널리즘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그것은 ‘벗길 수 있는 데까지 다 벗기자’, 또는 ‘벗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벗자’는 풍조를 낳는다.

물론 모든 걸 톡 까놓을 때 비로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문제는 벗고 벗기는 폭로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은밀히 엿보며 즐길 뿐인 일종의 관음증 환자의 태도에 있다. 그것이 다수 대중의 이름으로 지속되는 한 안티 문화는 무늬만 저항일 뿐 냉소주의의 늪을 벗어날 수 없다.

방관자적인 구경꾼에게 세상은 ‘그저 쇼’이며 ‘다 그렇고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벗는 쪽이나 벗기는 쪽에나 공히 최대의 적이 아닐는지. 그러니까 안티 문화에 열광하는 이들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누군가 “패러디는 빨래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속시원하게 비틀고 뒤집고 주무른 다음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 그렇다. 안티 문화엔 바로 이 빨래정신이 필요하다!

김성기(현대사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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