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이 시대에 만연한 인명경시 풍조

  • 입력 2000년 8월 23일 16시 10분


며칠 전 러시아정교회는 볼셰비키혁명 직후인 1918년 7월에 시베리아의 에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 손에 무참히 학살된 니콜라이 2세 일가 전원을 러시아정교회를 지키려다 순교한 '성인'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필자가 잠시 살피려는 대목은 "그들이 성인으로 떠받들여질만 하냐"가 아니라 그들이 학살되고 매장된 경위이다.

유럽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이 혁명세력에 의해 처형된 대표적 사례로 흔히 두 가지를 꼽는다. 1649년에 영국에서 처형된 찰스 1세의 경우와 1791년에 프랑스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정식으로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으며 기소와 재판 과정이 국민에게 공개됐고 그들은 스스로 또는 변호인을 통해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었다. 사형도 미리 공시된 한낮의 시간에 공시된 장소에서 대중환시리에 집행됐다.

그러나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그와 그의 일가는 기소된 일도, 재판에 회부된 일도, 변호의 기회를 가져 본 일도, 사형선고를 받은 일도 없이 연금 상태에서 오밤중에 몇 명의 지방 볼셰비키 하수인들에 의해 총살됐다. 학살자들은 그들의 시신을 한밤중에 폐광의 갱도에 암장했다가 다시 야음을 틈타 더 깊은 산 속에 암장했다. 이 때 한 하수인은 황후의 시체에 성적 모욕을 가한 뒤 그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볼셰비키 정권이 출발부터 얼마나 인명을 경시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제로 볼셰비키 정권 73년의 역사에서 참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스탈린의 철권 통치 시기에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없애기 위해 한 마을 또는 한 군(郡)의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았다. 소련 말기에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났던 대형 참사만 해도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풍조의 한 작은 산물이었다. 이 풍조는 오늘날의 러시아에로 그대로 이어져 쿠르스크 핵잠수함 침몰 사건에 대한 푸틴 정부의 늑장 대응에서 재연됐다. 118명의 승무원의 고귀한 생명이 걸린 이 사고를 푸틴 정부가 우물쭈물 다루다가 결국 승무원 전원 사망의 참사로 막을 내리게 한 배경에는 인명경시의 오랜 전통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어디 러시아 뿐이었겠는가. 옛 얘기는 모두 접어두고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반세기의 현대사만 들쳐 보아도 인명경시 풍조의 사례는 많은 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 1975년의 공산화 이후 캄보디아에서 특히 폴포트 정권에 의해 벌어졌던 대학살, 비슷한 시점에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에서 극우군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과 인권탄압,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이 해체된 지난 9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소수민족에 대한 집단학살, 그리고 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집단학살 등은 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전후의 현대사가 사실은 야만의 역사였음을 말한다.

남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 한반도의 경우 역시 인명경시의 풍조 속에서 학살에 다름없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오늘날까지도 남북관계에 큰 멍에로 남아 있는 6·25 동족상잔 때만해도 남과 북 모두에서 학살의 참극이 저질러졌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 뒤에도 남과 북 모두에서 각각 이념과 체제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또는 정권유지를 위한 국민탄압과 대중조작의 수단으로 무고한 시민의 인권을 탄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일이 여러 차례 저질러졌다. 남의 경우 적지않은 부분이 진상을 드러냈지만, 북의 경우는 전해지는 소식이 있을 뿐인데 뒷날 북이 개방사회로 바뀌면 지금은 감춰진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남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익어가는 고무적인 이 시점에 굳이 남과 북 모두가 갖고 있는 부끄러운 부분을 언급하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서 인명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풍조가 함께 뿌리내려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을 지향해야겠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믿음이 남과 북 모두를 지배하게 될 때, 가장 반(反)인간적 행위인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사람이 이념과 체제의 도구가 아니라 만유(萬有)의 으뜸으로 대접받는 이상사회를 가꿔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김학준(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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