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21]뉴욕의 文化지도가 바뀐다

  • 입력 2000년 8월 15일 19시 06분


‘새로운 사람, 새로운 돈, 새로운 문화(New People, New Money, New Culture).

많은 뉴요커들은 최근 몇 년 새 뉴욕 문화의 변화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인터넷 문화의 보편화와 미국 경제의 호황이 탄생시킨 주머니 두둑한 ‘신 인류’가 뉴욕의 문화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 ‘뉴 피플’은 일요일 낮 늦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 체인점 ‘스타 벅스’를 찾은 젊은이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납할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간단하게 구별된다. 간밤에 ‘코즈모닷컴’(cosmo.com) 같은 인터넷 배달 서비스로 빌려본 테이프를 반납하는 것이다.

인터넷 비디오 대여 서비스가 ‘뉴 피플’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이곳 기성세대에게는 뜨악한 일임에 틀림없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지만 실제로 배달해주는 곳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이기 때문이다. 뉴욕대에서 뉴미디어를 강의하는 데니 로진은 “직접 가서 금방 빌려오면 되는데 굳이 컴퓨터로 주문하고 30분씩 기다리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공개된 업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신뢰할 만하다(authentic)고 여긴다”고 설명했다.

이런 ‘뉴 피플’의 새로운 행태는 미국 닷컴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인프라가 됐다. ‘새로운 돈’이 나스닥으로 몰리면서 실리콘 앨리와 월 스트리트에는 하루 아침에 큰 돈을 쥐게 된 젊은이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최근 미술을 필두로 예술시장의 판도를 급속하게 바꿔놓는 것도 이들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면 “뉴욕과 런던 경매장을 오가면서 등단한지 몇 해 되지도 않은 신인들의 멀티미디어 작품을 ‘묻지마’ 구매하는 신원 불명의 젊은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현대예술의 흐름 뿐만 아니라 뉴욕의 문화지형도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동원할 수 있는 돈의 크기에 따라 근거지가 결정되는 거주의 재배치가 몇 년새 이뤄졌다. 대표적인 지역이 소호(SOHO)로 이제는 ‘가난한 예술가의 거리’가 아니다. 2,3년전부터 20,30대 백만장자들이 정형화된 아파트 대신 탁 트인 공간을 마음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이곳 스튜디오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뒤따라온 고급 브랜드의 패션 점포가 자리 잡으면서 소호는 순식간에 ‘다운타운 쇼핑몰’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올라 50평짜리 스튜디오 월세가 보통 6000∼7000달러에 이른다. 지난해까지 소호에서 갤러리를 운영했던 양 킴은 “빌 게이츠 같은 갑부나 제프 쿤스 같은 부유한 예술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동네가 된 소호 거리에는 쇼핑백과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만 넘쳐난다”고 말했다.

이곳을 세계적인 예술의 산실로 만들었던 많은 갤러리와 예술가들은 더이상 신흥 부촌에 머물 수 없었다. 3년전 뉴욕의 대표적인 갤러리인 폴라 쿠퍼 화랑을 필두로 3분의 2 가까운 화랑이 값싼 창고 건물이 많은 챌시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나스닥 호황은 인적이 드물어 황량하기 그지 없는 챌시의 집값을 1년 사이에 3,4배나 올려놨다. 다시 짐을 싸지 않을 수 없는 많은 화랑은 맨해튼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 공장지대로 쫓겨갔다. 브루클린에 형성된 신 예술촌 ‘덤보’(DUMBO)가 최근 신예 아티스트의 산실로 주목받는 데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다.

‘뉴 머니’는 문화만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뉴요커의 정신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란 신조어가 최근 뉴요커의 화두로 자리잡은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30대 중반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영영 불가능하다는 말에는 이들이 가진 위기감이 투영되어 있다.

뉴욕대 사진학과 교수이면서 문화비평가인 프레드 리친은 “‘뉴 피플’이 주도하는 ‘뉴 컬처’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문화는 갈림길에 서 있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진정한 다원주의의 길과 사회적 네트워크에 필수적인 대인접촉이 사라진 개인주의의 길이다”.

그는 구체적인 전망을 유보하면서도 “‘뉴 머니’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한탕주의를 만연시키고 문화의 생산보다 소비에 치우치게 만들어 신인류의 문화적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뉴욕시 정부가 올해의 슬로건으로 ‘세계의 문화 수도’를 내건 것은 어쩌면 이런 위기감의 표현이 아니겠느냐.”

<뉴욕〓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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