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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8월 11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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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황진이가 당시 왕가 종친 벽계수의 계책에 빠져 지었다는 이 시조는 지금도 유명하다. 벽계수가 거문고 반주와 함께 한 곡을 근사하게 뽑자 다소곳이 옆에 앉은 황진이. 그러나 벽계수는 그녀의 마음을 달구려고 일부러 본 체도 않고 말을 타고 떠나려 했다. 말이 몇 발자국을 뗐을 때 황진이가 이 시조를 지어 부르자 그는 뒤돌아보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황진이는 “명사가 못되는 풍류랑이구먼”이라며 웃고는 가버렸다고 한다.
▷조선 중종조의 유학자 서경덕은 벽계수와는 달리 황진이의 존경을 받았다. 황진이는 학문과 인격 도야에만 심취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선비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서경덕을 찾아갔다. 몇 차례 수작을 건넸으나 서경덕은 흔들림이 없었다. 서경덕은 학문탐구에서 독서나 탁상공론을 배격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시했다. 요즘 용어로 하자면 실사구시(實事求是)에 가깝다.
▷개성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개성부기(簿記)와 차인제(差人制)이다. 서양의 복식부기는 13,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개성상인들은 송나라나 아라비아 무역상들과 거래하면서 화폐유통과 산술법에 따라 고유의 개성부기를 만들어 썼다. 또 개성 상공인들은 2세에게 가업을 넘겨주기 전 반드시 남의 가게에 맡겨 수습훈련을 시켰다. 이런 관행이 차인제다. ‘현대’가 연내에 개성 육로관광을 트기로 북한과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남녘 동포가 개성에 갈 수 있게 된다면 북녘 손님들도 서울에 와 조선 500년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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