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낙하산과 당근

  • 입력 2000년 7월 21일 19시 07분


영화 쉬리에는 고참 정보요원이 “내 여기 근무 20년에 너 같은 요원은 처음이야. 너 낙하산이지?”라며 신입 후배를 나무라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통용되는 ‘낙하산’의 뜻은 권력의 비호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선배한테 복종하지 않고 궂은 일에는 요리조리 빠지며 상황이 불리할 때 가장 먼저 달아나는 정보요원들을 총칭하는 별명으로 쓰인다. 그런 사람들조차 하나같이 자신에게 낙하산별명이 주어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면 이 단어의 뜻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짐작케 해 준다.

낙하산이 계속 말썽이다. 거의 매일 전국사회보험노동조합과 국민건강보험공단간에 벌어지고 있는 광고 논쟁에도 낙하산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두 단체간의 감정 싸움은 얼마 전 공단의 노조가 박태영이사장의 뺨을 때리고 임원들을 위협해 이른바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주었다고 해서 말썽 난 후 더욱 격해졌다.

▼勞使역전 정부가 원인제공▼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손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안쓰럽다. 군대에서 윗사람한테 받는 기합도 아니고 직급상으로 한참 아래에 있는 부하직원들한테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까. 얼마나 참기 어려웠으면 풀려나자마자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투의 ‘강경투쟁’을 결의하고 나섰을까. 노사의 입장이 바뀐 듯한 모습이다.

노조원들의 안하무인식 폭력행위는 물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 과연 노조측만의 잘못 때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투자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이한 노사 역전 현상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것이 낙하산주변 인사들의 주장이다. 정부가 참을성이 부족해 이런 일을 자초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들어보니 일리가 있다.

이 정부 들어서서 대부분의 공공기관장들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갔다. 정권 창출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돌봐줘야 하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타당성과 설득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인사가 계속되다 보니 임명권자와 낙하산 양쪽에는 비판의 화살만 쌓였다. 여론으로부터 한바탕 공격을 받고 부임하는 낙하산들은 태생적으로 약점을 갖고 자리에 앉기 마련이다. 그런 약점을 노조가 놓치기를 기대한다면 무리다.

그러다 보니 낙하산은 첫 출근날 노조원들의 저지로 건물의 문에조차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고 이런 저런 승강이 끝에 며칠 걸려 겨우 사무실에 들어설 때쯤 되면 이미 노사협상 대상인 많은 현안들은 일방적으로 노조측에 양보된 뒤이다.

오기있는 몇몇 낙하산들이 노조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나섰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엊저녁 만난 기관장 한 사람도 그런 악성 관행을 고치려고 고집을 피우다가 청와대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가뜩이나 당신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왜 조용히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었다. 소리가 나더라도 정부가 참아 주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싸움을 중간에서 그만두라니 결국 노조측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노조가 인사권 갖는 파행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노조측은 낙하산이 내려올 때마다 결혼지참금처럼 갖고 오는 당근을 계속 뺏아먹으며 한발씩 스스로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어느 공기업은 인사권을 노조가 갖는 해괴한 일까지 일어났다. 사장이 인사를 하면 노조위원장이 동의를 해야 집행이 된다. 마음 약한 사장은 아예 처음부터 노조위원장의 눈치를 살피고 ‘부탁의 말씀’이 있는지를 물어 미리 인사에 반영한다고 한다. 공공기관이나 단체의 최종적 운영 책임을 지고 있는 이 정부의 체면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태로 손상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노사관계는 한번 잘못되면 바로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얻었건 노조원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를 포기토록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놓고 지금 나타난 결과만 갖고 정부가 노조측을 나무라다 보니 노조가 승복할 리 없다. 오히려 ‘우리의 낙하산은 이 난리통에도 골프를 했다’며 연일 신문광고를 내 정부와 경영진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이같은 사회적 왜곡 현상은 낙하산인사가 만들어 낸 상징적 산물이며 이 정부는 그 대가를 두고 두고 치르게 될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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