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그람시의 여백'

  • 입력 2000년 7월 7일 18시 51분


▼'그람시의 여백' / 르네이트 홀럽 지음/ 이후▼

미국의 작곡가 브리튼이 작곡한 어느 교향곡은 처음부터 거의 끝 부분까지 반음 간격으로만 계속 진행되다가 나중에 갑자기 2도 간격으로 바뀐다. 실제로는 겨우 반음이 넓어진 셈이지만 그 곡을 듣는 사람들은 마치 한 옥타브 이상이나 넓어진 것 같은 상쾌함을 경험한다. 실제의 작은 차이도 이렇게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습관은 학자들에게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술사가의 눈에는 19세기 초반에 나타난 회화의 두 흐름인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하지만 불과 반세기 이후에 등장한 인상주의 회화와 비교해 보면 이 두 사조는 이질적이라기보다는 동질적이기까지 하다. 철학사를 보더라도 근대의 대립적인 두 사조인 합리론과 경험론은 오히려 쌍생아라고 할만큼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사가들의 눈에는 대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지식 사회에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편가르기가 한창이다. 이런 구별은 현실 조건과 상관없이 학자들의 머리 속에서만 나온 것은 아닐까? 물론 르네이트 홀럽 역시 명쾌한 대답을 내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부제인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가 암시하듯이 그녀는 그람시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두 넘어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녀가 그람시를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로 선택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다르다. 그는 전통적 경제결정론의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주장했다. 이로써 결국 경제와 정치, 문화와 예술 등 모든 사회적 측면들이 각기 서로 이질적인 공간이라는 독해가능성의 빌미를 제공한다. 보비오가 그람시로부터 전투적 투사의 이미지를 벗겨냈다면, 샹탈 무페는 아예 그를 맑스주의자가 아닌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변모시켰다. 그러한 변화무쌍함은 바로 그람시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광범위한 스펙트럼때문이다.

홀럽은 이 책에서 그람시의 근대적 전투성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의 양면성을, 오히려 그러한 두 대립 항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으로 해석한다. 그람시의 생각 속에는 근대적인 비판이론적 기획과 동시에 최근의 서사학이나 기호학적 성과가 이룩한 결과가 이미 선취돼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람시는 텍스트를 사회적 맥락 속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모두 포함하는 생산과정으로 고찰하고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생산자의 관점에서만 보는 근대적 고찰 방식의 포기는 텍스트에서 타자의 수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모든 주장들이 그람시에게서 이미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람시를 빌어서 그녀의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타난 그람시는 전투적인 맑스주의자가 아닌 포스트모던한 이야기꾼 같다. 정철수 외 옮김, 326쪽, 1만2000원

박영욱(고려대 철학과 강사·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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