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기자의 책·사람·세상]번역 리콜

  • 입력 2000년 7월 7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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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칸의 제국’(이산) 역자 후기에는 보기드문 ‘고백’이 실려있다.

‘이산이 중국관계 전문 출판사여서, 번역 원고를 꼼꼼히 읽고 몇몇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처음 번역을 의뢰받았을 때만해도 역자 김석희씨와 편집자 사이에는 적잖은 긴장이 흘렀다. 저자 조너선 스펜서는 역사가 이전에 탁월한 문장가. 까다로운 문체 때문에 출판계에서 A급 번역자로 꼽히는 김석희씨가 선택됐다. 그는 “대여섯번쯤 번역 원고 교정을 본다”는 출판사측 얘기에 “만약 내 번역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리콜하겠다”며 언짢은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시했었다. 번역자 출판사 모두 정확성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리뷰제도 도입 바람직▼

그러나 ‘선수가 선수를 알아봐주는’ 이런 화답(和答)은 드문 일이다. 아무리 번역의 책임이 역자에 있다해도 번역 원고를 원문과 대조해서 읽는 최소한의 검증조차 거치지 않고 책을 내놓는 출판사가 부지기수다. 결과는 뜸도 안 들인 밥처럼 사전적 정의를 나열한 번역책의 양산이고, 독자의 외면이다.

번역지원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는 대산문화재단은 묘책을 냈다. 97년부터 선정작품에 대한 리뷰(Review) 제도를 시행하는 것. 지원대상자가 번역을 마치고 나면 복수의 심사위원에게 평가를 맡겨 만약 잘못됐을 경우 재번역을 요구한다. 신경숙의 ‘외딴방’을 영어로 옮긴 역자는 이 리뷰과정을 통해 재번역을 요청 받았고 그 후 1년을 더 공들였지만 2차 리뷰 통과에 실패해 결국 번역출간을 포기하게 됐다.

▼진정한 문화독립 출발점▼

“물론 지원자 본인에게는 몇 년씩이나 허비하게 했으니 미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한번 번역판이 나오면 그 책이 잘못됐든, 가치가 있든 재번역이 나오기 어려우니 기준을 지켜 한권이라도 제대로된 작품을 내자는 거죠.”(대산문화재단 곽효환과장)

19세기 일본 명치유신의 기반이 네덜란드문화의 충실한 번역작업인 난학(蘭學)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고, 근대 프랑스 문화의 출발점이 다름아닌 고대 그리스 문화유산의 불어화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번역이 왜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지난주 발간된 번역서 가이드북 ‘미메시스’(열린책들) 2권에서 많은 번역가들은 “아직 중요한 책들이 너무 많이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한국의 번역현실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있다. 삼척동자도 아는 ‘서유기’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야 ‘서유기’ 완역이 추진되고 있고, 20세기초부터 읽어왔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최근에야 일어 중역(重譯)이 아닌 원어 번역본이 발간됐다. 세계인의 문화자산을 제대로 된 우리말로 옮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문화독립’의 출발점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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