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박명림/평화와 통일을 향한 소리가…

  • 입력 2000년 6월 13일 19시 28분


현실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2000년 6월13일의 파격과 흥분과 감동은 분단과 전쟁과 증오의 과거가 무너져내리는 장려한 의식이었다. 새 세기의 첫 6월은, 역사 속의 전쟁과 살육의 계절을 일거에 화해와 평화의 계절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마침내 세계냉전의 진앙을 함께 녹여내고 또 성큼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역사적 시간은 종종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다. 평양으로의 짧은 비행, 순안공항의 환영과 열광의 의식(儀式)은 55년 걸린 긴 비원의 축도에 다름 아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공항영접은 모두의 예상을 깨는 파격이었다. 세계를 향한 그의 첫 등장은, 반세기 동안 적대하던 남한 최고 지도자와의 공개적인 대낮 대면을 통해서였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시간이 멎는 듯한 잠시의 짧은 떨림 이후, 둘은 여러 번 만난 듯 익숙한 몸짓과 표정으로 서로를 맞았다. 두 정상의 맞잡은 손은 ‘적대의 과거’를 넘어 ‘화해 협력의 미래’로 나아가는 ‘현재의 가교’이다. 나아가 둘의 악수는 민족 전체의 화해의 악수이다. 저들의 악수는 이제 이 땅에 전쟁의 위협이 항구적으로 소멸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하고 다짐한 엄숙한 자기약속이 되었다.

지난날 우리 민족의 고통과 시련은 오늘의 지혜를 위한 거름이었다. 그 거름 없이 오늘의 지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두 정상은, 흥분보다는 고도의 절제를, 딱딱함보다는 자연스러움으로, 어색함보다는 친밀함으로 우리와 세계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두 정상(頂上)은 너무도 정상적(正常的)이었다. 그들은 왜 흥분하지 않는가? 저 절제미(節制美)는 민족의 비원의 깊이를 함축하고, 흥분조차 삼킬 만큼 냉철해진 지난 시절 우리의 이성과 준비를 드러낸다. 저들의 절제와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이 하루를 얼마나 오랫동안 예비해왔었는지를 웅변한다. 남과 북이 운명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자고 역설하는 김대중대통령의 도착성명은 그의 평양방문의 핵심메시지이다.

첫 만남은 평화와 통일을 향한 미래의 정초(定礎)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 정상회담에서 민족의 화해협력을 도모하기로 하였다는 짧은 전언은 미래의 민족사의 긴 과정을 방향지을 언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상을, 대책을, 정책을 꼼꼼히 추슬러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두 정상은 전체 민족의 열망과 희원을 담는 시대정신의 구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혁명 17년전 이미 “혁명의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며 혁명은 광산의 중심 수갱(竪坑)으로부터 그 지하 갱도를 유럽의 모든 왕국으로 뻗치고 있다고 쓴 바 있다. 오늘 우리는 서울에서 발원하여 평양에서 맺는, 반도의 남단으로부터 북단에까지 뻗쳐 있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혁명의 두터운 소리를 듣고 있다.

박명림<하버드대 하버드-옌징연구소 협동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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