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전문가 스트레스']살아남으려는 자의 아픔들

  • 입력 2000년 6월 9일 19시 13분


건설회사 과장인 박모씨(35)는 최근 큰마음을 먹고 AFKN 관련 1만5000원짜리 영어 교재를 샀다. 이미 올해 들어 산 영어책만 7권. 토플, 토익은 물론 영어회화 테이프와 에세이류 영어교재에 각종 단어집까지 종류별로 없는 책이 없을 정도다.

“공부도 안하면서 책만 산다고 핀잔을 줄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할 수 없죠. 뭔가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습관적으로 책을 사고 있습니다.”

박씨의 어학 교재 ‘구입병’은 영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올 들어 초급 일본어 교재와 테이프도 한질 구입했다. 박씨가 이처럼 어학에 집착하는 이유는 ‘주특기를 가져야 살아남는다’는 중압감 때문.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하에서 전문영역이 없던 동료들이 사정없이 해고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30대 중반 이후의 직장인들이 최근 ‘살아남으려면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스페셜리스트 스트레스(Specialist Stress)’를 앓고 있다.

하지만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선 이들에게 새로운 전문분야를 찾기란 쉽지 않다. 너도나도 어학에 매달려 보지만 이미 ‘토익 800점은 기본’이라는 20대 후배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쭈뼛거리며 인터넷 관련 서적을 뒤적여보지만 인터넷에 대한 기본도 익히기 전에 회사는 이미 정보검색사 등 전문가를 고용해버린다.

여러 부서를 돌아다니며 아무 일이나 별 무리 없이 해내도록 길들여진 이들에게 갑자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돼라’는 요구는 생소하기만 하다. 결국 이들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하나’에 대해 고민만 하다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역회사에서 식품 수출입을 담당하는 천모씨(38)도 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 전문가 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한때 경제방면의 전문가가 되겠다며 경제학 서적을 뒤적였지만 이미 회사에는 경제학 박사 출신 직원이 여러명 있어서 ‘뛰어야 벼룩’이라는 인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천씨는 “우리는 전문지식보다 인간관계를, 톡톡 튀는 개인의 능력보다 조용한 팀워크를 중시하도록 교육받으며 살아온 탓에 갑자기 닥친 전문가 시대에는 솔직히 적응도 안되고 자신도 없다”고 푸념했다.

직장인들의 이같은 스트레스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들은 지나친 강박관념은 오히려 자기개발에 해를 준다고 지적한다.

서울백병원 정신과 고대관(高大官)박사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압박감 때문에 직장인들이 자기 능력보다 훨씬 높은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스트레스의 이유”라며 “특정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환상보다는 원만한 인간관계 등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의 장점을 더 살리는 것이 회사와 자신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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