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허구와 진실의 경계, 로마史 다룬 '글라디에이터'

  • 입력 2000년 5월 24일 14시 21분


굶주린 로마 군중을 목숨으로 위로했던 검투사. 거대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의 바닥을 진득한 피와 야수의 울부짖음으로 채워 놓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의 과거가 그처럼 잔혹했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의 죽음이 미친 듯한 환호로 보답 받는 그 곳에 인간성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2000년 전 콜로세움의 광경은 영화와 좀 달랐다. 검투사를 양성하는 프록시모(올리버 리드)는 늘어선 사내들에게 곧 다가올 죽음의 순간을 알려 주지만 사실 경기장에서 죽는 검투사는 십 분의 일에 불과했다. 결투는 죽음이 아니라 부상이나 굴복으로 끝나곤 했다. 막시무스(러셀 크로)가 야수와 전차들 사이에 던져지는 모습도 고대 로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관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검투사에게 자비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사실과 정반대다. 그것은 죽음의 표시였다. 관객이 손가락 두 개를 일자로 세워야 검투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글래디에이터>의 제작자 더글러스 윅은 "옥스포드의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대부분이 역사에 충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글래디에이터>의 중심은 "살아서 복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하기 위해" 검투사로 살아 남은 장군 막시무스다. 원한에 찬 이 허구의 인물을 폭풍 같은 스펙터클로 담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각색이 필요했다. <글래디에이터>를 보고 나서 2세기 로마의 역사를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폭군 코모두스▼

영화 속에서 로마를 막시무스에게 맡기려 하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슬픔과 분노에 찬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믿음조차 얻지 못한 코모두스가 폭발한 것이다. 증오 섞인 눈물을 흘리는 이 19세 소년은 권력을 탐내는 야심가보다 상처 입은 어린 아이에 가까워 보인다. 누구에게도, 그토록 매달린 누이에게조차 사랑 받아 본 적 없는 코모두스는 질식해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로마를 피로 물들이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150일 간의 검투 경기와 원로원 의원들의 목숨으로 맹세를 실천에 옮긴다.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건설한 5선제. 그 마지막 황제였던 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는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열 두 살 때 그는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이유로 노예를 용광로에 던져 버렸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던 그는 젊은 여자 300명과 소년 300명을 하렘에 두고 섹스에 탐닉했다. 그는 로마의 번영을 끝장 냈다. 사색적이고 온화한 황제 마르쿠스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만족할 줄 모르고 불안정한 코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었다. 코모두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디온 카시우스는 코모두스가 황제를 독살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천연두 같은 전염병으로 죽었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다.

누이 루실라와의 관계도 사실과 다르다.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는 누이만을 사랑하며 매달리지만 결코 그녀를 갖지 못한다. 그녀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후에도 코모두스는 루실라를 죽일 수 없다. 평생 자신 곁에 묶어둘 구실로 삼을 뿐이다.

그러나 2세기에 실재했던 로마 황제 코모두스는 "눈에 띄는 여자 친척과는 모두 동침한" 인물이었다. 루실라도 거기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후에 루실라는 원로원 의원들과 연합해 코모두스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실패한 그 암살자는 죽기 전에 경솔하게도 자신의 배후를 발설했고 다른 의원들처럼 루실라 역시 처형당했다.

▼검투사 코모두스▼

영화에서처럼 코모두스는 육체적인 강인함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헤라클레스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해 신화가 전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그대로 사자 가죽을 걸치고 곤봉을 들고 다녔다. 그는 또 자신이 불굴의 검투사라고 생각했다. 막시무스를 향한 질투에 미쳐 단 한 번 검투장에 서는 <글래디에이터>와 달리 코모두스는 735번 검투장에 나타났다. 한 역사가는 "코모두스는 피로 뒤범벅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제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검투사들이 수없이 그의 손에 죽어 갔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바위로 분장시켜 과녁으로 삼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복장이었다. 735번 경기를 치를 때마다 코모두스는 은조각 2만 5천 개를 이어 만든 갑옷을 입었다. 로마는 그의 취미 때문에 파산했다.

▼종말▼

<글래디에이터>는 영웅의 죽음이 불러온 희망으로 끝맺는다. "불타 죽은 아들의 아버지며 능욕 당한 아내의 남편" 막시무스는 복수를 마치고 전쟁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영웅이 되어 눈을 감는다. 폭군의 통치에서 벗어난 로마는 헌신적인 원로원 의원 그라쿠스와 함께 공화정의 시대를 맞을 것이었다. 그러나 막시무스와 그라쿠스는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로마의 미래는 그처럼 밝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벗어난 코모두스는 결국 친구라고 여겼던 레슬러 나르시수스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죽었을 때 로마의 재정은 거의 바닥 상태였다. 코모두스에게는 후계자도 없었다. 다섯 달 동안 네 명의 황제가 혼란스러운 로마를 지배했다. 용병은 반란을 일으켰고 권력에 눈이 먼 정치가와 군인들 때문에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의 영광은 코모두스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김현정(parady@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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