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호택/돌아온 배우, 떠나간 배우

  • 입력 2000년 5월 18일 19시 29분


4·13 총선에서 당선된 강신성일씨(63)는 두 번이나 낙선한 뒤 부인 엄앵란씨가 비빔밥 장사를 하며 내조를 했다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60년대에 유소년기를 보낸 지금의 장년들은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청춘 영화가 돌아가는 극장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거의 매일 그의 대형 초상이 그려진 영화관 간판을 보며 성장했다.

그러니 그의 당선 소식을 듣고 마음 한 구석으로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TV가 없던 시절부터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뭇 여성의 가슴을 뛰게 한 ‘청춘 스타’ 신성일의 영예는 5선의원 이상의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16대 국회가 개원하면 6순의 초선 의원으로 33세 전대협의장 출신 임종석 당선자와 나란히 앉게 되다니.

강신성일씨는 한국의 앤서니 퀸(85)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인가. 8순에 새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는 주책은 존경스럽지 않더라도 ‘노트르담의 꼽추’ ‘25시’ 등에서 그가 펼친 연기는 아직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요즘에는 그가 출연하는 작품을 옛날처럼 자주 보기 어렵다. 몇해전 교수의 아이를 임신하고 유부남 초콜릿 외판원과 사랑에 빠진 여대생의 할아버지로 나온 ‘구름 위의 산책’을 보며 추억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뉴욕 마피아의 늙은 중간 보스로 출연한 ‘고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강신성일씨는 앤서니 퀸보다는 로널드 레이건이 되고 싶었던 것같다. 그는 유세 때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대통령도 영화배우였다”고 말했다지만 레이건은 미국 사람들도 인정하는 2류 배우였다. 언젠가 레이건이 출연한 영화를 인내심 하나로 보다가 그가 정치로 전업한 것은 오랜 자기 성찰에서 나온 탁월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격려금’ 파문으로 환경부장관에서 물러난 연극배우 손숙씨는 최근 안톤 체호프 원작의 ‘세 자매’에서 마샤 역을 맡아 지방 공연을 다닌다. 연초에 홍익대 앞 소극장 산울림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를 각색한 모노 드라마 ‘그 여자’ 공연을 보았다. 무대로 복귀해 첫 출연한 작품이었다. 무대 뒤에서 만난 손숙씨는 “개막 3일전까지 대사가 외워지지 않아 걱정했다”며 “상처가 커 마음을 다잡느라 힘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모스크바에서 ‘어머니’ 공연이 끝난 뒤 기업인들이 무대 위에서 척박한 연극계를 위해 써달라고 주는 격려금 봉투를 2초 동안 흔들어 보고 정동극장장에게 넘겼는데 얼마 후 언론이 사납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도 옷로비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장관은 그토록 애착을 갖고 보호하려던 정부가 자신의 일에는 맥없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한다.

김성우씨(명예배우)는 손숙씨의 복귀를 이렇게 환영했다. “배우가 무대를 떠나고 보면 그 무대 바깥이 얼마나 무대 위보다 더 희극적이고 비극적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참으로 큰일날 뻔했다. 이 땅의 관객들은 배우 하나를 영영 잃을 뻔했다.”

무대의 배우는 돌아오고 은막의 배우는 떠나갔다.

<황호택 기획팀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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