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학/창조하는 삶이 더 아름답다

  • 입력 2000년 4월 21일 20시 09분


겨울 방학을 맞아 유학중인 나를 방문한 아이들에게 미국의 초등학교를 다녀보게 한 적이 있었다. 딸아이가 미국 학교 생활은 참 재미있다고 해 이유를 물었더니 줄넘기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많이 하나 경쟁을 하는데 이곳에서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모두가 신나게 줄넘기를 해 몹시 즐겁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무한 경쟁을 외치는 우리 사회 분위기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대통령부터 경제계와 언론은 물론 심지어 교육기관까지도 개인과 국가의 생존 전략으로 무한 경쟁을 늘 강조한다.

우리도 다른 애들이 하는 과외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으면 뒤떨어지는 것같아 불안해한다. 부모들은 아이의 인성이나 적성을 바르게 키워 주려 하기보다는 경쟁력만 갖춰주면 자녀들의 미래가 보장될 거라는 식으로 가치의 전도 현상을 보여 준다.

그 결과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심지어는 죽어 묻혀야 할 묏자리를 잡는데도 경쟁을 한다. 과학기술 시대인 오늘날에는 더욱 더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경쟁에 빠지게 되면 이기느냐 지느냐에만 몰두해 일 자체의 가치는 뒷전이 되는 것이 아닐까?

간디,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를 생각해보자. 그들의 삶이 경쟁적이었는가. 그들은 누구도 가지 않으려 하는 길을 선택했고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그들을 인류 최고의 인간으로 존중받게 했고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가치 있게 쓰여지게 했다.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기술의 세계에서도,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이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빌 게이츠를 보라. 그는 하버드대라는 경쟁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것이다. 경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에디슨의 삶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얼마 전 TV를 켰더니 국회의원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야당 부총재와 전문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여당 후보가 상대방을 헐뜯고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 학교 회장 선거도 저렇게는 하지 않는다면서 놀라워했다. 비방보다는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신명나게 알리는 것이 훨씬 공감을 더 얻을 수 있을텐데도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데만 몰입하고 있었다.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숫자 싸움과 상호 비방을 경멸하는 우리 자신도 정작 싸움과 비방을 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간다. 이웃과 동료를 위선적으로 대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하도록 해 자신을 늘 불행하게 만드는 데도 우리는 이 경쟁 의식을 버리지 못한다.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신명나게 자신의 삶만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가. 창의적인 삶,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비교하는 삶, 남보다 나아 보이기 위한 삶이 결코 우리의 주인이 돼서는 안된다. 서정주의 시에도, 파벌로 카잘스의 첼로 소리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도 무한 창조와 무한 인내는 있어도 무한 경쟁은 없다.

다가오는 시대는 무한 창조의 시대다. 기존 가치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경쟁은 창조의 길이 아니라 공멸의 길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의력을 키우자는 것과 창의적인 삶을 위해 창의력을 키우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한 경쟁을 국가 지상 목표처럼 떠받들고 ‘창조’와 ‘경쟁’을 혼용하는 무성의를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한다. 하루 속히 ‘무한 경쟁’은 ‘무한 창조’로, 경쟁으로 얼룩진 ‘일등 국가’는 가치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살맛 나는 국가’로 대체돼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친구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줄넘기하는 교정을 그려본다.

윤학(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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