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인터넷상 不法행위' 운영자 책임 범위는?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40분


“OO회사는 결코 재기할 수 없다. 차라리 망해야 하는 회사다. 더러운 정신에 더러운 기업가치…. 대우보다 먼저 망했어야 하는데…. 제발 망해서 사라져라….”

증권정보를 제공하는 P인터넷 사이트에 한 투자자가 4월18일 올려놓은 글이다. 법조인들에 따르면 이런 내용은 형법상 신용훼손이나 명예훼손이 될 소지가 크다고 말한다. 그러나 글을 올린 사람은 익명. 따라서 이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P사에 법적 책임이 있느냐가 문제된다.

이처럼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 명예훼손과 저작권 침해 등 각종 불법행위에 대해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ISP·Internet Service Provider)의 법적 책임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도서관에 몰래 음란물을 갖다 놓은 경우 도서관이 그 음란물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는 문제다.

영국 ISP협회 니컬러스 랜스맨 사무국장은 “전화회사가 가입자들의 통화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처럼 ISP도 웹사이트의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법조인들은 “온라인서비스 업체들은 그 불법행위로 인해 많은 가입자를 유인하는 등 이익을 얻게 되므로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ISP에 관계된 첫 번째 사건인 ‘커비 대 컴퓨서브’ 사건에서 미국 뉴욕지방법원은 ‘발행인과 단순 배포업자’의 논리를 세웠다. 즉 발행인이라면 명예훼손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만 ISP가 신문가판점이나 서점처럼 단순 배포업자 역할만 했다면 책임이 없다는 것.

그러나 95년 ‘스트래튼 오크먼트 대 프로디지’ 사건에서는 전자게시판 운영자가 게시판 내용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게시판에 올라온 명예훼손 글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국 법원은 ‘ISP가 명예훼손이나 저작권 침해 등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경우 또는 그 침해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은 경우에 한해’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판례를 세워나갔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2월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사인 주칵테일이 자사의 프로그램이 중앙대 홈페이지를 통해 불법 복제됐다며 중앙대를 상대로 낸 소송이 첫 사건. 이 사건에서 서울지법은 ‘온라인의 제공만으로 그 온라인 게시물의 불법성에 대해 책임을 물릴 수는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조인들은 상당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인터넷의 익명성을 악용해 인터넷을 ‘불법(不法)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며 인터넷상에서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의 소재와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현행 민법과 저작권법 등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ISP의 책임과 그 한계를 정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를 다루는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우리는 미국처럼 판례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지금 단계에서 별도로 법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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