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저팬 더 블라인드?

  • 입력 2000년 4월 17일 19시 45분


일본을 한없이 치켜세운 책으로는 70년대말에 나온 ‘저팬 애즈 넘버원’도 꼽힌다. 그런데 저자인 미국의 사회학자 에즈라 보겔은 그 일어판에 이런 고언(苦言)을 붙이고 있다. ‘일본에 현재 필요한 것은 국제화의 의미를 고쳐 생각하고 국제적 시야를 갖는 정치가를 육성하는 일이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존경과 우호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도쿄도 지사의 발언 파문을 접하면서 새삼 보겔 교수의 충고를 떠올리게 된다. 요즘 국제적 ‘망언’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 으레 그 주역은 일본 정치인이다. 뉴밀레니엄을 맞는 오늘날 지구촌 어느 나라의 정치인도 그렇게 ‘이웃’들의 기가 차게 하는 소리를 끝없이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이시하라는 얼마전 육상 자위대 창설기념식에서 “제3국인이 지진과 같은 재해가 날 때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자위대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의 폭언 전과는 화려하다. “일본군의 난징(南京)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일본은 독자적인 방위전략을 세우고 재(再)군비 선언을 하는 게 낫다.”

더 큰 비극은 망발 망언에 대한 일본 유권자들의 인식이다. 오히려 그런 우익 정치인에게 표를 더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지난날의 한국 중국에 대한 침략 지배를 “자존(自存) 자위(自衛)를 위한 것이지 침략이 아니었다”고 하고 “일본이 아니었으면 미국 러시아에 먹혔을 것이니”라고 되풀이한다. 도둑이 날뛰는 세상에 내가 앞질러 훔치고 빼앗았기로서니 무슨 범죄냐는 역사 인식인 것이다.

바로 역사인식이 문제다. 95년 6월 의회 차원에서 태평양전쟁 패전 40주년 관련 사과(謝過)결의 얘기가 나오자 자민당 내에서는 ‘경솔하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을 쓰지 말라. 국가의 존엄과 관계가 된다’ ‘잘못했다고 전과자로서 머리를 숙인다는 말인가’하는 반론이 거세게 일었다. 끝내 결의는 그런 사무라이식 위협에 짓눌려 볼품 없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역사에 관한 한 ‘저팬 더 블라인드(맹목의 일본)’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역사에 눈감는 자는 미래도 볼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은 독일의 전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였다. 독일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는 일본에 비해 진솔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일본 정치인 상당수는 ‘우리가 영국 독일보다 식민지에서 더한 것이 뭐냐’면서 사죄 반성을 피하려 한다. 천황의 전쟁책임조차도 일본 국민의 절반 가까이 인정(86년 시사통신 세론조사)하는 판이지만 천황은 참회하지 않고, 일본 정치인들은 눈을 감고 외면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피해와 상처에는 한없이 서러워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정당했다’고 말하면 발끈하는 일본이다. 이시하라도 ‘우리는 진주만에서 소수의 미군전투원을 죽였을 뿐인데 그들은 원폭으로 비전투원 수십만명을 죽였다’고 열을 올렸었다. 일본의 선전포고와 전쟁범죄, 그로 인한 미국 한국 중국 등의 피해는 가리고 파묻는다. 대신 참혹한 원폭피해만 보편적인 이성에, 세계인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멀리 보는 일본인, 두루 살피는 열린 지식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되어 나온 ‘칼럼으로 본 일본’(소화출판사)의 저자 야스에 료스케(98년 작고). 그는 이웃나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일본을 한없이 개탄하곤 했다. 92년 재일 한국인이 처음으로 일본의 하급 공무원으로 들어가자 ‘회원제 나라인 일본’의 벽이 조금 열린 것이라고 갈채를 보냈다. 그는 일본군위안부나 식민지배 문제에 관해서도 ‘외무성이 힘을 다해 국익을 지켰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국익을 크게 손상시킨 것’이라며 스스로의 역사에 대하여 정직해야 하고 이웃나라에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90년 전 일본이 조선을 삼킬 무렵 미국 예일대에서 교수로 있던 아사가와 간이치는 걱정했다. ‘일본의 재난’이라는 책을 통해 “예양 의심(義心) 억제 반성 같은 일본 국민의 미덕이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재난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고 했다. 오늘날 일본의 정치인을 비롯한 ‘위’가 역사에 눈을 떠야 한다. 의심(義心)으로 깨끗이 반성 사죄하는 태도로 이웃의 존경과 우호를 얻어야 한다. 이시하라 같은 이가 부추기는 ‘저팬 더 블라인드’는 또 다른 재난을 부를 수 있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