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콜레라'와 '페스트' 사이의 선택

  • 입력 2000년 2월 15일 19시 33분


돌아보면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 정말이지 대단하다. 정형근씨나 이근안씨 같은 인물들이 안기부와 경찰의 대공(對共)수사관으로서 ‘국가를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던 ‘우리 헌정사 최대의 암흑시대’를 이겨냈으니 말이다(이 글에서 따옴표로 묶은 표현은 모두 정씨의 말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 둔다).

▼ 또 방탄국회 소집한 野 ▼

정형근씨는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서도 오른쪽 눈 하나로만 세상을 보면서 두 눈을 다 쓰는 사람을 모두 ‘좌익분자’로 간주하는 것 같다. 우선 ‘한밤중에 국회의원을 끌어가겠다는 포악한 짓을 한’ 김대중대통령은 ‘좌익분자’의 왕이다. 정형근을 비난하는 자는 모두 김대중이 ‘동원한 홍위병’이다. 정형근씨의 극우적 상상력은 21세기 벽두의 대한민국을 졸지에 ‘좌익광풍’이 몰아치는 ‘좌익광란의 시대’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그 ‘좌익광풍’은 무척 시시하다. 정형근씨와 같이 ‘국가를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던 사람들이 일으켰던 우익광풍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때는 밤중이 아니라 백주에 국회의원을 잡아가 개 패듯 때려잡았다. 고춧가루물 먹이고 전기로 지져서, 그야말로 뼈와 살이 녹는 ‘광란’의 밤을 맛보게 해 주었다. 야당 의원이 대통령을 인신공격하면 중앙당사를 쑥밭으로 만들고서라도 물고를 냈다. ‘좌익분자’를 대통령으로 모신 검찰관들이 체포영장도 집행하지 못했는데 이런 물러터진 정권을 보고 ‘좌익광란’이라고 하니 정형근씨야말로 ‘정신 나간 사람 아닌가’.

문제는 정형근 개인이 아니다. 어디에나 ‘정신 나간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 ‘정신 나간 사람’을 싸고도는 한나라당이다. 이회창총재는 위헌 혐의가 짙은 선거법에 복종하지 않는 시민단체를 향해 법을 지키라고 훈계했다. 그러고서 정작 자기네는 법원이 발부한 영장의 효력마저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 지난번에는 국세청을 동원한 불법 선거자금 모금 관련자를 보호하려고 일년 내내 방탄국회를 열더니 이번에는 반인륜적 고문범죄에 관련된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또다시 방탄국회를 소집했다. 여당의 전횡을 견제하겠다며 표를 달라고 하는데 총선에서 이기면 도대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벌써부터 여간 걱정이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 여당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당의 행태도 한숨이 나기는 야당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청와대와 민주당은 대통령 주위에 인의 장막을 형성한 동교동계 참모들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공천심사위원회가 공식적인 공천심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공천확정자와 공천유력자 명단이 신문 지면을 뒤덮는 최근의 사태는 새 천년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농담거리로 만들고도 남는다. 이것은 낡은 천년에 반복되었던 하향식 공천보다 더 후퇴한 극단적인 비민주적 밀실공천이다. 설문의 객관성이 의심스러운 전화여론조사와 동교동계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비밀 심사를 진행하면서 계파를 형성할 수 없는 사회 각 분야의 지명도 높은 인사들을 개별적으로 영입하여 선거전에 투입한다. 현직 장관들까지 징발해서 전선으로 내모는 데는 더 할 말이 없다. 이런 정당이 총선에서 이긴다고 해서 그 무슨 개혁을 더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부 여당의 문제는 ‘좌익광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필칭 개혁을 한다면서도 스스로는 더욱 경직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함몰되었다는 데 있다. 나는 검찰이 왜 이 시점에서 정형근의원에게 손을 댔는지, 어떤 정치적 손익계산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아는 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이것이 인권과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순수한 법 집행이라고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 與 극단적 밀실공천 한심 ▼

아쉽다. 이럴 때 믿을 만한 야당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권력의 맛에 중독된 집권당보다는 야당이 국민의 뜻을 읽는 데 열심인 법인데 우리의 야당은 그렇지가 않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야당 죽이기 타령을 하면서 정치적 본거지의 지역감정과 적색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총선이 다가올수록 겁이 난다. 이대로 나가면 콜레라와 페스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괴로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시민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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