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영화 '춘향뎐'감독 "판소리로 보고 영상으로 듣고"

  • 입력 2000년 1월 30일 19시 35분


임권택 감독의 새영화 ‘춘향뎐’이 관객에 선보이자 마자 화제다. 우리의 소리인 판소리가 이 영화의 ‘주연’이고 영화 장르의 중심역할을 해 온 영상은 소리의 흐름을 충실히 좆는 ‘조연’으로 빛을 발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단군 이래 한민족의 여섯 번째 밀레니엄, 21세기의 첫 설에 맞춰 임감독이 들고 나온 새 장르 ‘판소리 영화’는 문화의 세기 벽두, 큰 명절을 앞둔 우리의 정서를 묘하게 파고 든다.

영화의 ‘본질’인 판소리 부분은 일단 접어 두고 스토리의 ‘변질’부터 보자.

-영화 속에서 이도령과 변학도는 ‘남자 대 남자’로도 만납니다. 변사또를 ‘골방’에 가둔 어사 몽룡이 ‘연적’에게 “수청거절한 괘씸죄를 그리 과하게 다루시셨소?”라고 일상의 어투로 묻고 변사또는 “에미의 신분을 좆아 기생이 되고 종이 되는 종모법을 아니라 하니 나를 향한 발악이 아니라 이 나라의 근본을 부정하는 국사범”이라고 합니다.

“몽룡이 ‘행정고시’ 선배인 변사또를 동헌에서 바로 봉고파직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그래서 몽룡이 변사또를 전라감영으로 보내면서 ‘억울하면 이조(吏曹)에 원정(原情)하라’고 합니다. 몽룡의 인간됨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만 몽룡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었다면 기생의 수청 문제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썼겠습니까. 변사또가 없었다면 춘향의 열부(烈婦)됨이 드러났겠습니까.”

임감독은 춘향이 ‘엄청난 열녀에 교양을 갖췄다’는 시각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도령이 한양으로 떠나겠다고 하자 ‘치마를 찢는’ 그런 계층일 뿐이라고 본다.

-기존의 주류영화와 달리 ‘춘향뎐’은 판소리가 영화의 중심이고 나머지 요소들이 중심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주연이고 화면은 주연을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소리와 영상은 어느 한쪽이 좋으면 다른 한쪽이 죽는 관계입니다. 함께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8년전 4시간35분에 걸친 조상현씨의 판소리 ‘춘향가’를 듣고 충격을 받은 뒤 줄곧 고민해 왔습니다. 뻔한 이야기에 듣고 볼 때마다 감동하는 것을 보면 ‘춘향전’은 그 자체로 탄탄한 구성을 지녔습니다. 판소리라는 장르와 구성의 우수성이란 두 요소를 믿고 이를 영상과 결합하는 큰 모험을 한 것입니다.”

-‘춘향뎐’은 기존 영화의 문법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해체’입니다.

“판소리는 ‘귀의 명창’이 있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감상의 측면에서도 수준높은 장르입니다. 판소리의 원형을 지키면서 관객이 재미와 흥겨움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판소리의 리듬과 영상의 리듬이 같아 둘이 함께 갈 수 있다면’, ‘판소리 리듬에 영상 리듬이 얹힐 수 있다면’, 그리고 ‘관객이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한다면’의 세 전제를 놓고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냈다’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주연들의 연기도, 풍광도 소리에 묻혀 있다. 또 연기가 서툰 느낌도 준다. 하이틴의 사랑이 ‘기술적으로’ 서툴 것이라는 선입견이 옳다면 이 모든 것들이 ‘계산된 서툼’이란 결론에 이른다.

-그렇습니까?

“뭐,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젊은 세대는 인스턴트 ‘접속 사랑’도 하지만 마음 한 쪽으로는 순애보를 그리워 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세계적 성공이 반증이 될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구 형식(판소리)에 낡은 콘텐츠(순애보)를 담은 ‘춘향뎐’도 젊은 층의 관심을 끌 법한데….

“신분제가 흔들리던 시대에 ‘인간’이고자 했던 춘향의 몸부림이 변사또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요즘 어린 사람들에게 없는 순수함이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을 던져 이뤄내기 어려운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조선시대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은 지난해 말 동아일보가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서 전세대를 통틀어 ‘지난 천년간의 대표적 로맨스’로 꼽혔다. 이 같은 소재의 ‘춘향뎐’은 판소리가 대사를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변사(辯士)가 활동하던 시대의 무성영화를 연상케 한다. ‘탈(脫) 주연·탈 스토리 중심’이란 점에서 지난 세기 후반의 화두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21세기 초입에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퓨전된 영화를 만나고 있다.

<홍호표문화부장>hphong@donga.com

▼'춘향뎐'唱 조상현?/12세때 판소리 입문 리듬구사 기교 탁월▼

영화 ‘춘향뎐’에서 주연의 역할을 한 판소리는 인간문화재 조상현씨(61) 창본의 춘향가로 이는 동편제의 한 유파인 김세종제의 것. 조선 철종 때의 명창인 김세종의 제자 김찬업을 거쳐 정응민에게 전수되었고, 조상현은 정응민에게 이를 물려받았다. 당대의 명창들을 통해 내려오면서 각 명창들의 특징과 뛰어난 대목들이 고루 담겨 있는 것이 조상현 창본 춘향가의 특징. 조의 성음이 분명하고 리듬 구사와 목청을 꾸미는 기교, 사설이 어느 창본보다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상현씨는 12세 때인 51년 명창 정응민의 제자로 들어가 7년간 사사하며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를 뗐다. 58년부터는 광주 호남국악원 조교를 하면서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웠고, 70년에는 마지막 스승인 명창 박녹주의 눈에 띄어 3년간 흥보가를 이수받았다. 71년부터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면서 ‘소리꾼’하면 나이 지긋한 노인을 연상하던 통념을 깨고 시원시원하게 불러 제끼는 창법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우리가락 좋을씨고’ 등 방송 프로 출연과 73년 설립한 판소리보존 연구회 활동으로 ‘멀리 있는 국악을 대중 가까이 끌어온 개척자’라는 평을 듣는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로 현재 사단법인 한국판소리 보존연구회 이사장, 중요무형문화재 총연합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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