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민/왜 갈수록 소외감 느끼나…

  • 입력 1999년 10월 29일 18시 56분


70년대 팝송 한 곡이 끝났다. 라디오 진행자가 불쑥 한마디 던진다. “참 좋죠! 이런 거 보면 음악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말이 참 상쾌하다. 세상에는 변화가 곧 발전인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단 두 줄 짜리 액정화면으로 된 ‘르모’라는 이름의 워드프로세서를 보고, 글자를 수정할 수도 있고, 간단한 한자를 직접 칠 수 도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던 것이 불과 십여년전의 일이다. XT급 컴퓨터를 쓰다가 AT급 컴퓨터를 쓰니까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386, 486을 586 펜티엄급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40MB면 충분하리라던 기본 용량은 1GB를넘은지오래다. 인터넷은 그 때 상상도 못했다.

글을 읽다가 ‘자왈(子曰)’이 나오면 ‘논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뒤져야 했다. 선생님께 여쭈면 “그것도 몰라” 하는 핀잔부터 들었다. 사마천이나 한비자의 인용은 찾을 길이 막연해 아예 각주 달기를 포기했다. 스승의 식견만이 해결책이 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해당 원문 가운데 한 글자만 알아도 컴퓨터가 알아서 다 찾아준다. 그 절대적이던 스승의 권위도 컴퓨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정보를 다루는 방법만 알면 된다. 알맹이는 컴퓨터에 다 들어있다. 여태까지 원고지에다 직접 써야 글이 써진다고 믿는 원로들은 젊은 학자들의 왕성한 작업량이 잘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변화가 다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전엔 사서삼경을 읽고 사마천의 ‘사기’를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정신을 같이 배웠다. 지식이 정보에 그치지 않고 삶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필요할 때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논다. 편리해지기는 했는데, 그 지식이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만이 문제가 된다. 공부를 해도 ‘왜’ 하는지는 궁금하지가 않고, ‘어떻게’ 써먹을까만 궁리한다. 학문하는 일이 기쁨이 되지 못하고 고통만 준다.

옛 글을 읽다가 혼자 읽기 아까워 수업시간에 들고 들어갔다. “참 좋지?” 반응이 없다. 썰렁하다는 표정이다. “선생님, 이런 공부를 왜 해야 해요?” 그 표정이 하도 진지해 망연자실할 때도 있다. 취업 준비에 여념없는 4학년 학생들에게 고전 비평을 강의한다. 연암 박지원을 이야기 한다. 참으로 난처하다. 막막한 느낌마저 든다.

몸만 훌쩍 자라 버린 요즘 아이들처럼 허우대만 멀쩡한 것이 우리 문화의 표정이다. 물질의 삶은 발전의 속도가 참으로 빨랐다. 정신의 삶은 꼭 그렇지가 않았다.

물질이 풍족할수록 정신은 날로 황폐해 간다. 도구적 지식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영어만 잘하면 출세할 수 있다. 컴퓨터만 잘하면 그 어렵다는 대학입학도 아무 문제가 없다. 방법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구호만 있고 나는 없다. 풍문만 있지 실체가 없다. 문화를 얘기하지만 주제가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도처에 웅성거림뿐이다. 매일매일은 너무도 바쁜데, 막상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새 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구호가 요란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불안해진다. 왜 그럴까?

정민<한양대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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