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44)

  • 입력 1999년 10월 13일 18시 50분


며칠 후에 서울 올라가면 한 번 뵙겠습니다.

그러세요. 헌데…우리 아이는 지금 입시생이어서…어느 때 보다 정서적인 안정이 중요해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지된 것에는 정면 충돌하지 않는다. 돌아가면 될테지.

그냥 한 선생이나 그 애나…얘기가 듣구 싶어서요.

올라오시면 연락 주세요.

네, 그럼 이만….

인사가 오가고나서 통화가 끊겼다. 나는 다방 아줌마의 시선을 피하노라고 일부러 자리에 가 앉지않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작고 동그란 창 아래를 힐끗 내려다 보았다. 여기서는 지붕 한쪽만 보일뿐 마당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지런한 검은 조선식 기와 골이 보인다. 나는 화장실 안에 들어섰다. 안쪽에 칸막이를 했는데 거기 걸터앉을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으리라. 소변기를 향하여 마주 서니 바로 정면에 창문이 그대로 있었다. 역시 예전 그 마당이 내려다 보였다. 삼 월의 봄볕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한옥 처마 아래에는 화분이 줄지어 늘어섰고 맞은편 담장 아래 향나무며 철쭉이며 동백이 가지런한 깔끔한 뜨락이 보였다. 전에는 나무들이 훨씬 젊었겠지만 어땠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화장실에 먼저 다녀온 윤희가 쾌활하게 말하던 게 생각났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뜰을 보았다고. 분꽃도 심고 채송화 맨드라미에 나팔꽃과 수세미 넝쿨도 올렸더라고. 저 집의 대청에서 비 오는 날 부채도 접어 놓고 파전을 부쳐서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다가 함께 마시면 좋겠더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보통 날들.

나는 다방에서 나와 시장통으로 가서 살건 사고 읍내에 생겨난 신식 슈퍼마켓에도 들러서 순천댁이 적어준 품목들을 샀고 점심도 사 먹고 내 장도 보았다. 택시를 타고 왕복 차비에 응하니 처음에 올 때처럼 가벼운 실랑이도 없었다. 겨우 십 분만에 나는 갈뫼의 모퉁이 길에 들어섰다. 차를 돌릴만한 빈터가 있는 토담 앞에서 내려 순천댁네로 간다. 순천댁이 부엌에서 내다보다가 내가 양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지를 받으러 쫓아 나왔다.

방금 전화 왔든디?

나한테요?

잉, 동상 되는 정희라는 이가 했습디다.

뭐라고 해요?

저 머시여 오 선생이 여그서 잘 지내시냐고 건강은 좋냐고, 머 그런 야그하고. 이따가 저녁 때 집에 가먼 은결이보러 전화 하랜다고 그러데. 오 선생 바꿔 줄 수 있냐고.

아, 예에….

그로부터 방으로 돌아가 나는 손에 들고 왔던 물건들을 냉장고와 수납장에 챙겨 넣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구들장을 지고 누워 있었다. 아마 그네는 내 전화가 끊긴 뒤에 생각을 했겠지. 그리고 내가 매우 억제하고 있었다는 느낌도 받았겠지. 나는 그네에게 섭섭함 같은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고나 할지. 정희는 우리의 충격을 몇 차례에 걸쳐 여과를 하겠다고 작정한 걸까. 나는 내가 아버지라는 것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그애와 아무 이야기나 주고 받고 싶었고 윤희의 말투며 목소리의 흔적이 어디 남아있지 않은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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