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5)

  • 입력 1999년 8월 26일 19시 07분


밑반찬은 있는데 그래두 비린 반찬 생각이 나서 꽁치 깡통 사다가 간장하고 풋고추 넣고 조렸어요. 아점을 맛있게 드세요.

저는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겠습니다. 끝으로 비밀 하나를 누설하자면 최미경의 별명은 콩자반이에요.

일주일쯤 지나서 시월 초엔가 송영태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나는 작업 중이어서 그와 한가하게 농담이나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모처럼 개어 놓은 물감을 말리기가 싫었다. 나는 응접실에서 화실 안으로 기웃이 넘겨다보는 그에게 콧등으로 말을 던졌다.

나 지금 바뻐.

응, 나 여기서 뭣좀 끄적거리다가 갈게.

나는 대답 않고 붓질만 했다. 색을 바꾸며 붓을 빨려고 일어서는데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쪽을 돌아보니까 영태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마 내 전활거야. 여…여보세요? 네 맞습니다. 접니다. 그 주소루 갖다 주세요. 물론 일시불입니다. 네에 삼십분 뒤에요? 기다리지요.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응접실의 입구로 가까이 갔다.

무슨 전화니? 자장면을 시키는 것 같진 않구.

뭔가 주문했지.

글쎄 그게 뭐냐니까…?

허허 기다려 봐.

나는 다시 화판 앞으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했는데 어쩐지 송가가 오고나서는 붓이 손에서 자꾸 맴돌기만 했다. 층계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무슨 작은 냉장고 같은 것을 포장한 채로 맞들고 들어왔다. 남자들은 회색의 점퍼와 같은 작업복을 아래 위로 입고 있었다. 가슴에 무슨 회사 마크를 찍은 것이 아마도 유니폼인 듯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들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네 복사기 주문하신 겁니다.

복사기요?

전동 타자기두 가져왔는데요. 이거 어디다 설치할 겁니까?

하는데 뒷전에 섰던 송영태가 앞으로 나서며 화실 안쪽 구석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따. 냉장고가 있는 바로 옆자리에 작은 탁자가 놓였고 그 위에 나는 대바구니를 놓고 마른 꽃이며 갈대며 열매 달린 감나무 가지 등속을 담아두었다. 그는 서슴없이 대바구니를 얹은 채로 탁자를 한쪽으로 치우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다 놓으쇼.

한 남자는 아마 타자기를 가지러 내려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다른 남자가 포장을 뜯었다. 송영태도 그를 거들었다. 두 사람은 냉장고의 코드를 뽑아 준비해온 다른 콘센트를 꽂고 복사기와 냉장고의 전원을 함께 연결했다. 나는 나설 때가 아니다 싶어서 그저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하는 꼴을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남자가 역시 포장한 타자기를 두 팔에 안고 와서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영태가 수표로 계산하고 그들은 영수증을 써 주고.

설명서는 여기 있슴다. 사용법 시범을 잠깐 보여드릴까요?

아니 사용해 봐서 알구 있어요. 됐습니다.

예에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십쇼. 즉시 달려와서 처리해 드리죠.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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