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30)

  • 입력 1999년 5월 31일 18시 53분


자전거는 다시 울타리 사이로 나와 아래로 주춤주춤 내려갔다. 나는 사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과수원의 나무들 사이에 앉아서 벌들이 잉잉대며 날아다니는 소리만 들었다.

윤희가 퇴근해서 돌아올 무렵까지 방안에서 뒷창문만 열어 놓고 앞의 방문은 꼭꼭 닫아둔채로 공연히 읽지도 않는 책을 건성으로 들치며 기다렸다. 윤희의 낯익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나서 그네가 혼자 중얼거렸다.

계셔요? 또 낚시갔나….

나는 그대로 베개에 턱을 괴고 엎드려 있었고 윤희가 무심코 방문을 열다가 스스로 놀랐다.

아이 깜짝야, 자구 있었어요?

얼른 들어와 봐.

윤희가 그제사 내 얼굴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낮에 누가 찾아왔던 일을 말했더니 윤희의 얼굴빛이 변했다.

사모님이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런 거 같애. 저녁에 다시 찾아온다구 그랬으니까 곧 올거야.

가만있어 봐요. 별건 아닐 거예요. 현우씰 잡으러 왔다면 그렇게 혼자서 자전거 타구 왔겠어요? 내가 내려가서 누가 찾아 왔었냐구 물어보구 올게요.

누가 왔는지 어떻게 알았냐구 그러면 뭐라구 하게.

사실은 현우씨가 있었는데 낮잠 자다가 잠결에 얼핏 들었다구 그러죠 뭐.

윤희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그네는 내가 염려할까봐서인지 오 분도 못되어서 곧장 돌아왔다.

아아 머 걱정할 거 없어. 지서주임이래.

그래두 혹시 모르니까 말을 맞추자.

좋아요. 우리는 작년에 약혼했어요. 당신은 고시공부 중이어요. 그런데 폐가 나빠졌어요. 결핵 초기 증상이 있구요. 당신 주민증 외우고 있어요? 증명서에 이름이 뭘루 되어있죠?

김,경,민. 나이 이십 구 세. 주소지는 인천이야.

이리 줘 봐요. 흥, 김전우도 아니잖아. 이건 누구 거예요?

몰라, 최동우가 구해 왔어.

일부러 자전거의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울타리 밖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윤희는 보여주던 주민등록증을 얼른 내게로 되돌려 던지면서 속삭였다.

왔어요!

계십니까….

윤희가 일부러 방문을 활짝 열어 젖히며 밖으로 나섰다. 그네의 다리 너머로 마당에 들어선 누런색 점퍼가 보였다. 윤희는 마루에 선채로 당당하게 물었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죠?

아, 요기 지서에서 나왔슴다아. 파악할 일이 있슴다. 이 집에 식구가 어뜨케 되지라?

둘이요.

그러니까….

하면서 지서주임은 그네의 등 뒤로 눈길을 돌려 막연하게 내쪽을 보았고 나는 윤희가 섰는 툇마루에 나가 걸터앉았다.

여고 나가신다죠? 그러고 이 분이….

약혼자예요.

틈을 주지않고 자르듯이 윤희가 대답했다.

신분증 좀 보았으면 쓰것는디라.

둘 다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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