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08)

  • 입력 1999년 5월 6일 19시 37분


산 동네를 향해 걸었다. 나는 그 동네의 언덕 길 반대편으로 오르는 셈이었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확인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앞으로 나의 잠수 생활에도 절대로 필요한 첫 번째의 임무이기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대로 순옥이를 찾아 가기로 작정했다. 큰 길에서 오르는 산동네의 어구를 피해서 반대편 쪽으로 언덕을 올라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브로크 담장과 시멘트의 벽이 나타난다.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작은 평 수의 집들이 상자처럼 붙어 있었다. 나는 먼저 명순이 순옥이네 집 앞에 이르러 벽에 기대서서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가느다랗게 트랜지스터 소리만 들려왔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누군가 혼자 남아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문간에 들어서서 부엌 문을 살그머니 밀어 보았다. 부엌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부엌 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반응이 없어서 처음 보다는 길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순옥이의 목소리였다. 아, 다행이다.

오 군입니다.

어머, 하는 가벼운 탄성이 흘러 나오고 나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한참이나 부시럭거린 뒤에 부엌에 불이 켜졌다. 부엌 문이 열렸다. 나는 얼른 안으로 밀고 들어가 버렸다. 순옥이는 아래 위 운동복 위에 빨강색 카디건 스웨터를 걸쳤다. 아마도 옷을 갈아 입은 듯한 눈치였다. 나는 염치없이 부엌과의 경계인 문턱을 넘어서 방 안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어리둥절 긴장된 표정으로 아직도 부엌에 웅크리고 섰는 순옥이에게 말했다.

부엌 불 끄고 좀 들어와 봐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요.

나는 방의 윗목에 앉았고 순옥이는 들어와서 자리가 깔려 있던 방의 안쪽에 가서 단정하게 앉았다. 나는 우선 남정네들이 늘 그러듯이 천장을 바라보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뜸을 들였다.

나는 사실 당국의 수배를 받고 숨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진 않았어요. 나는 대학교까지 다닌 사람입니다. 학교 때부터 뭐랄까…학생 운동을 했습니다.

무슨 운동인데요?

그건 데모꾼이었다는 말입니다.

아, 데모….

순옥이는 그 말에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가 잡히면 다른 사람들까지 줄줄이 잡힙니다.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혹시 박 형이 무슨 말 없던가요? 명순씨는 어디 갔어요, 그리구 경자씬?

경자는 요새 야근조예요. 명순이는 아까 박 씨 오빠랑 밥 먹는다구 나갔구요. 아마 요 아래 선술집에 있을 거예요.

아마도 형사들인 것 같든데 서울까지 날 따라 왔었어요. 박 형이 무슨 말 없었어요?

순옥이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박 씨 오빠 말은 별루 들어보지 못 했어요. 근데 명순이가 어제 그랬어요. 오 씨가 아무래두 막일 할 사람 같지 않다구요. 말투나 얼굴이나 이 동네 올 사람이 아니더라구 그랬어요. 그건 저두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봉제공장에서두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여자 대학생이 몰래 취업했다가 잡혀간 적이 있어서.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