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이광모/좋은 관객 만난 「…시절」

  • 입력 1998년 12월 3일 19시 11분


나는 무엇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가. 오래 전에 내 자신에게 화두처럼 던졌던 이 질문을 첫번째 장편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작업을 끝내고 다시금 던져본다.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면서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대해 그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발견과 이해를 통해 나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는 소중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게 하는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영화는 감독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떠한 영화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의 상상력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그들의 가슴 속에서 완성되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들려주는 소리없는 반응들은 영화감독이 자신을 성숙시키는데 필요한 자양분 역할을 한다. 관객들의 그 소리없는 반응에 겸허하게 귀기울임으로써 영화감독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감독으로서 좋은 관객을 만나는 일보다 기쁜 일은 없다. ‘아름다운 시절’을 몇몇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하면서 아주 좋은 관객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한 관객은 상영이 끝난 후 자신이 ‘아름다운 시절’을 보면서 지었다는 시 한 편을 적어서 건네주었다.

또 다른 관객은 자신이 ‘아름다운 시절’을 보면서 느낀 감흥이 전철을 타면 깨질까봐 전철로 20분이 걸리는 집까지 밤길을 걸어가면서 이 영화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았노라고 전해주었다. 그 평범한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아름다운 시절’에 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가질 수 있었고 작품을 만드는 내 마음가짐을 겸허하고 숙연하게 가다듬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름다운 시절’이 국내에 개봉되어 상영을 시작한 지도 벌써 2주째다. 국내 관객들의 반응에 귀기울이면서 나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 관객들이 영화를 잘 이해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성숙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감상하고 체험하려하기에 앞서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나는 씁쓰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접하는 관객들의 글 중 상당수가 영화의 감상문이기보다는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한 평가서들이다. 물론 그러한 추세는 90년대 들어 급속도로 성장한 소위 영상 세대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과 평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가슴 속에 침잠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은 채 행해진 판단과 평가는 감독과 관객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어설픈 칭찬은 작가를 오만하게 만들 것이고 신중하지 않은 비판은 작가로 하여금 반발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관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주는 별점 네 개나 다섯 개가 아니다. ‘아름다운 시절’을 통해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우리 관객들과 함께 겸허한 자세로 말없이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이광모(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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