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31)

  • 입력 1998년 11월 23일 19시 14분


반정 ⑧

나는 조국과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국은 칼이라도 맞은 듯 깊고 나직한 신음소리를 냈다.

승주의 반응은 호들갑스러웠다. “뭐라구?” 하고 대뜸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말더듬이처럼 “다, 다시 말해봐, 다시!”를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퇴근 후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들이 두환과 상봉을 끝낸 뒤였다. 술이 취한 조국과 승주는 그보다 더 취한 두환의 술잔에 소주를 부어주고 있었다. 부식의 말대로 두환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얼굴이 젊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쩐지 그의 인생은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고등학생에서 그대로 멈춰진 듯한 일면이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다리도 떨고 있었다. 키도 더 이상은 자라지 않았던지 이제 그는 승주보다 작았고 맥주배가 나오기 시작한 조국보다도 덩치는 되레 왜소해 보였다. 상가는 썰렁했다. 문상객도 거의 없었다.

그날 밤 우리 넷은 소희를 호위하듯 지켜앉아서 밤새 술을 마셨다. 우리는 제각기 소희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이 사무치고 그 상실이 너무나 쓰라려서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희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첫사랑은 훼손되지 않고 완성되었다. 우리에게는 첫사랑의 수줍던 갈래머리 소녀를 우연히 만났더니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서 낯색 하나 안 바꾸고 질펀한 음담을 입에 담는다거나 혹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전자요를 팔러 왔다거나 하는 구차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소희는 단 한 번 화려하게 개화했다가 그 아름다움 때문에 단번에 꺾여나간 흰 꽃이었다. 우리는 그때의 향기를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일한 사랑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하던 소희. 그러나 정작 소희 자신은 사랑을 선택한 바로 그날부터 더 이상 사랑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활에 쫓기듯이 살아왔고 삶의 신산 한가운데에서 죽었다. 그것이 소희의 인생이었을까.

모든 동업이 다 그런 것처럼 부부관계는 결코 공평할 수 없다. 불리한 측면을 더욱 많이 감당하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말은 부부 중 불리한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을 다독이고 구스르려는 대단히 계산된 수사(修辭)이다. 두 사람의 출분 자체도 그랬지만 두환의 인생은 소희의 것만큼 전락은 아니었다.

물론 두환이 성실한 가장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군대에서 운전을 배운 그는 스페어 기사로도 일했고 중고 봉고차로 전국을 돌며 장사를 한 일도 있었다. 이동 세탁소 같은 일도 해봤다. 해볼 만한 일은 다 하다보니 또 한편으로 겪을 만한 일은 다 겪었다. 새 차를 중고값에 준다는 전단 광고에 속아서 자동차 사려고 모아둔 돈을 사기당하기도 했고 적금을 타오던 길에 잠깐 화투장을 만졌다가 주머니 속 먼지까지 그 자리에 톨톨 털어놓고 가뿐하게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지방으로 다니면서 객고를 좀 풀다보니 정이 꽤 오래 간 여자도 있었다. 고생도 할 만큼 했다… 이 말은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속도 썩일 만큼 썩였다는 뜻인 것이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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