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6)

  • 입력 1998년 10월 26일 19시 23분


숙부인 ④

두환은 소희네와의 첫만남에도 빠졌다. 조국과 승주, 그리고 나만이 약속장소인 가톨릭센터 안의 휴게소로 나갔다.

여학생들은 몹시 거만했다. 그러나 그래도 될 만큼 예쁜 여학생은 소희뿐이었다. 하하 웃으며 설쳐대는 것은 조국이었다. 그게 편했는지 여학생들은 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존경하는 인물을 물어봐도 될까요?’라는 주근깨 많은 한 여학생의 질문에 그는 북극을 탐험한 난센이라고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답안을 만들어준 예상문제였다. 난센?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여학생이 되묻자 조국이 탁자 밑으로 내 발등을 밟았다.

―프리툐프 난센은 노르웨이의 해양학자이고 미술가입니다. 후퇴할 베이스를 남겨놓지 않고 그린란드를 동서로 횡단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요. 전쟁포로 석방, 난민구호 같은 업적으로 192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죠.

말을 마친 나는 스스로 흡족했다. 지금까지는 소희를 의식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젠 여학생들이 나를 존경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을 테니 거만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물론 전날 밤 백과사전에서 세 번이나 읽었던 사실이었다. 그 밖에도 나는, 최초의 손목시계는 1581년 엘리자베스 1세에게 선사되었는데 바늘이 하나뿐이었다는 둥, 1945년 시카고의 프로모터인 밀튼 레이놀즈가 생산한 볼펜은 물속에서 글이 써진다는 소문 때문에 1주일에 2만5천개가 팔렸다는 둥 잡다한 것들을 몇 가지 더 외워두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여학생 모두로부터 집중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승주였다. 처음에 그는 우수어린 눈빛만 띠고는 양팔을 깍지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0분 정도가 경과하자 불현듯 여학생 하나하나를 향해서, 마치 싸리문에 지나가는 흰 눈발처럼 무심하고도 서늘한 시선을 짧게 끊어 던지기 시작했다. 낙서를 하는 척하면서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을 여학생의 얼굴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자, 이제부터는 친목도모를 위해 레크레이션 시간을 갖겠습니다.

조국의 진지한 식순안내에 이어 승주가 케이스 안에서 기타를 꺼내자 여학생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그때 나는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소희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희는 물론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귓불이 발갛게 물든 소희가 보고 있는 것 역시 승주였다. 심장에 칼이 꽂혀 있었던지 북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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