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40)

  • 입력 1998년 9월 2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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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달의 잠행 (16)

애선은 곧장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석분을 마구 밟으며 휘적휘적 걸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트한 파마 머리. 시장에서 사 입은 꽃무늬 면바지, 엉덩이를 푹 덮는 줄무늬 반소매 셔츠에 플라스틱 슬리퍼 차림이었다.

―나팔꽃 넝쿨이 그새 좀 자랐네…

애선은 대문 앞과 테라스가에 다시 넝쿨을 뻗고 올라오기 시작한 나팔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전에 자기네 염소가 우리에서 나와 우리집 나팔꽃 넝쿨을 다 먹어버린 일을 두고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나팔꽃 넝쿨 따위 때문에 그토록 참담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본 애선은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라는 듯 몹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었다.

―비가 오니까, 할 일도 없고 고추전을 구웠어. 고추도 좀 따고. 요즘 반찬 해 먹을 것도 없고 입맛도 떨어지는 때잖아. 아무것도 넣지 말고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서 잔뜩 넣고 된장을 자작하게 끓여서 이것저것 넣고 비벼 먹는 게 제일이야. 우리 집은 요즘 깻잎쌈하고 매운 된장만으로 밥 먹어.

나는 애선을 테라스 의자에 앉히고 커피를 한 잔 더 뽑았다. 애선은 이런 커피는 맛이 없다고 투덜댔다.

―맨날 집 안에서 뭐해요? 어디 꼼짝하는 걸 못 봤어. 마을 사람들이 희수 엄마 병자인 줄로 알아. 처음엔 아래윗집을 헷갈려 가지고 윗집에 들어온 우체국장 첩이라고 소문이 났다가 중간 집에 이사온 사람인 줄 알고부터는 폐병에 걸려 요양 온 거라고들 수군거려요. 햇빛이라곤 안 봐 얼굴이 새하야니까, 더 그러지. 여기서 살려면 마을 사람들하고 무던하게 지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동네에 온갖 말이 다 도니까.

애선은 표면적으로는 부지런하고 소박하고 선량하고 수다스럽고 건강한 여자였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악의가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비난하기를 좋아했다. 처녀 시절엔 소도시의 동사무소에서 근무한 9급 공무원이었는데 지금은 염소와 닭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편은 건축업자라고 하는데 일이 없는 지 늘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애선이 늘 그렇듯이 끝도 없을 것처럼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집 앞 무덤가 밭에서 일하던 노파가 집으로 들어왔다. 노파는 여전히 90도로 허리를 꺾고 선 채 물 한 그릇 얻어 마시자고 말했다. 앉으라고 의자를 권해도 한사코 사양했다. 노파의 우의는 색이 낡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어서 살 속까지 비와 땀에 젖어 있었다. 노파는 물을 마시는 동안도 여전히 한 손에는 호미자루를 들고 있었다. 물을 마신 노파가 대문 밖으로 나가자 애선이 갑자기 목청을 잔뜩 낮추고 속삭였다.

―이 마을 옹녀 할머니예요. 이 박씨 집성촌 마을로 시집 온 지 한 달도 안 돼 남편이 징용을 갔는데, 전쟁이 끝나도 생사 확인이 되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았대요. 나이 스물도 안돼 자식도 하나 없는 청상 과부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 혼자 농사지으며 살기가 얼마나 힘겨웠겠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 저 할머니가 이 마을 땅을 야금야금 다 사들여 버렸어요.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온 마을 남자들, 말하자면 시아주버님, 시동생들, 시사촌들, 시고모부 등등 마을 남정네를 전부 다 자기 치마폭 속으로 끌어들여 간부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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