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경북안동 지례마을 13대종가 맏며느리 이순희씨

  • 입력 1998년 5월 20일 20시 05분


이순희씨
사람이 꼭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살다보면 모든 것 다 때려치우고 훌훌 바람처럼 떠나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 사는 게 그런가. 마음만 굴뚝 같을 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제풀에 지쳐 하기 싫은 일도 숙명처럼 받아들여 저마다 ‘진주조개’같은 고통속의 ‘찬란한 꽃’을 피운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산 769. 의성 김씨 지촌공파 13대 종가가 자리잡고 있는 곳. 뒤엔 영지산이 말없이 우뚝 서있고 앞으로는 임하호가 담담하게 누워 있다.

산과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을 한번 가려면 비포장길 7.5㎞를 걸어야만 하는 외딴 곳.

그 집에 살고 있는 맏며느리 이순희씨(52). 화장기 없는 얼굴, 자신이 직접 염색한 한복, 핀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동여맨 이씨의 첫 인상은 후덕한 촌부(村婦) 그 자체다.

하루 일과도 마찬가지.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 풀뜯고, 홑이불에 풀먹이고, 채소밭을 가꾸다 보면 엉덩이 한번 제대로 바닥에 붙일 겨를이 없다.

이씨는 과연 이런 일들이 좋을까.

“결혼 전엔 저도 안동 시내에 살았어요. 25년 전 이곳에 시집오니 모든 것이 달라졌죠. 온 천지에 쇠똥이 가득해 발 디디기도 힘들었어요. 맏며느리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늘 긴장하고 살아야만 했죠. 하지만 이젠 다 괜찮아요. 모든 일들이 제 삶에 녹아 한몸이 돼버렸으니까요.”

이씨는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두달이고 석달이고 바깥세상에 나가질 않는다. 그러다 보면 곧 마음이 편안해지고 넉넉해진다.

그렇다고 이씨가 세상과 영 담쌓고 사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알 건 다 안다.

“아무 문제 없어요. 세상이 좋아져 안방에서 TV뉴스로 세상 흐름을 한눈에 훤히 알 수 있어요. 또 손님들이 갖고 오는 날짜 지난 신문 보는 재미도 여간 크지 않아요. 저희 집을 가끔 찾는 예술인들이 전해주는 세상 얘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극작가 박용구씨가 전해주는 옛날 작가 얘기들을 한번 들어보세요. 아마 그런 생생한 얘기는 제가 바깥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들을 걸요.”

종부(宗婦)의 가장 큰일은 누가 뭐래도 크고 작은 제사들. 매년 이씨가 모셔야하는 제사는 밤에 지내는 기제사(忌祭祀) 열번, 명절 차례 두번, 이틀간 진행되는 시제(時祭) 등 모두 열세번.

“갓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께선 불쑥 찾아오는 손님까지도 후하게 대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그땐 그게 얼마나 힘들고 하기 싫었던지…. 지금은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그것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요.”

어찌보면 이씨의 삶은 순종적인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이다. 그러나 정작 이씨는 이런 시선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이곳이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어요. 이곳의 산과 강과 하늘은 이미 저에겐 다 한식구인걸요. 그저 같이 사는거죠 뭐. 그래서 그런지 이곳 경치에 자지러지는 손님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 이씨는 하고 싶지 않은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그냥’ 아는 것이다.

이씨는 “올 스물다섯인 우리 큰아들이 이 집을 계속 잘 가꾸며 살 수 있는 후덕한 색시를 맞았으면 원이 없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안동〓김호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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