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동포의 오늘 ⑤]냉대받는 귀국 동포

  • 입력 1998년 4월 27일 19시 56분


김순애씨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니었다. 지명은 바뀌지 않았지만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뒷동산에 뻐꾸기 울던 그런 고향은 아니었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산업화는 고향을 통째로 들어다 전혀 다른 땅에 옮겨놓은 듯했다. 바뀐 것은 고향 산천만이 아니었다. 인심도, 삶의 방식도 또한 달라져 있었다.

사할린의 한인들에게 고향방문이 허용된 것은 89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소련 사이에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그해 처음으로 63명의 한인들이 고향 땅을 밟았다. 종전과 함께 귀향길이 막힌 지 실로 44년만의 일이었다. 한인들의 영주귀국은 3년 뒤인 92년에 처음 이뤄졌다. 이후 적십자사의 주선을 통해 영주귀국한 한인들은 3월 현재 2백98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달라진 고향에 실망하고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갔다.

96년에 영주귀국한 김순애(金順愛·73)씨도 그 중 한 사람. 그의 고향은 강원 삼척시 원덕읍 호산. 김씨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광림교회가 운영하는 춘천 ‘사랑의 집’에서 살다가 지난해 6월 사할린으로 돌아갔다. 그를 사할린에서 만났다.

“다시 만난 자식들이 한국에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떨어져 있어보니 자식들과 손자들 모습도 눈앞에 삼삼해 못견디겠더라고요.”

김씨는 자식들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어렵게 얻어낸 영주귀국을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내심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지 않게 실망한 듯했다.

“잠시 들르는 것 하고 아주 살러가는 것하고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아요. 아주 살러왔다고 하니 나를 대하는 친척들의 태도가 어딘지 달라보였어요. ‘어떻게 자식들을 두고 혼자 왔느냐’며 나보고 독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당장 사할린으로 돌아가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김씨를 낙담케 한 것은 친척들의 달라진 태도뿐이 아니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김씨로서는 한국의 높은 물가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93년5월 영주귀국했다가 2년만에 사할린에 되돌아온 이종우(李鍾禹·85)씨는 넉넉하지 못한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어서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온 경우.

“하루에 담배 한 갑, 한달에 목욕 한 번, 두달에 이발 한 번을 하고 경로당 모임에 간간이 참석하자면 한 달 용돈이 4만원은 필요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아들에게 보태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용돈을 달라는 소리가 차마 안나왔어. 며느리와 손자들 보기도 민망하고….”

드물게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한 한인도 있었다. 취재진이 사할린에서 돌아와 만난 김성자(金聖子·45·부산)씨가 그런 케이스. 김씨는 94년4월 사할린 한인 2세로는 처음으로 남편 한성환(韓成煥·48)씨와 함께 영주귀국했다. 그의 귀국은 부산에 사는 시어머니가 “한씨 집안의 대가 끊긴다”며 아들 부부의 귀국을 한국정부에 여러차례 간청해 이뤄졌다.

김씨는 부산역 맞은편 속칭 ‘텍사스 골목’에서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50평 규모의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그러나 아직도 한국인 친구가 없다고 했다. 가게는 별 어려움 없이 꾸려가지만 인간관계는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한국말을 할 줄 모르던 둘째 아들(22)은 처음에 선배들한테 모르고 반말을 하다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저도 한국 풍습을 몰라 아이들 교육을 잘못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속상한 적이 많아요. 우리 같은 한인들의 영주귀국사업이 빨리 진척되지 않는 것은 한국민과 정부가 우리들이 오는 것을 싫어해서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우리들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사업에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은 과연 얼마나 성의를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한일 양국은 94년11월 일본정부가 32억엔의 건립자금을 대고 한국정부는 부지를 제공해 사할린 귀국동포들을 위한 5백가구의 아파트와 수용인원 1백명 규모의 요양원을 짓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부지 물색에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진척이 늦어져 아파트는 지난해 7월, 요양원은 최근에야 겨우 착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사지연은 차라리 문제가 안됐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요양원 건립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였다. 3월11일 취재진은 요양원이 들어설 인천 연수지구 적십자사 부지 인근의 한 아파트단지를 방문했고 그곳 부녀회장으로부터 주민들이 요양원 건립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요양원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주민들이 있어요.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살게 되면 아무래도 환경이 나빠질 수 있어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사실이에요.”

인천적십자사의 한 관계자는 “연수구청으로부터 주민들의 집단민원이 예상되니 요양원 명칭에 사할린이라는 말이 안들어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요양원을 기존의 적십자병원을 증축하는 형태로 짓고 명칭을 ‘인천적십자의료복지원’으로 하기로 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귀국동포용 아파트 5백가구를 경기 안산시 고잔지구에 건립키로 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정부는 건립지로 진주 용인 인천 등 여러 곳을 검토했으나 해당 시와 군이 규제해제의 어려움, 주민들의 반대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해 결국 고잔지구로 결정하고 말았다.

홋카이도(北海道)신문의 아오키(靑木)차장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기자에게 혐오시설이 자기 이웃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님비(not in my backyard)’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위로하듯 말했으나 이것이 과연 ‘님비’의 문제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끝―

〈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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