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⑧]조세 행정

  • 입력 1998년 4월 23일 19시 43분


투자이민을 떠나 칠레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42). 돈깨나 번 것으로 소문났지만 변변한 집 한채가 없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현금장사를 하고 세금은 적당히 줄여 신고해온 김씨. 몇년간 돈을 모아 호화주택을 사려다 벽에 부닥쳤다. 칠레에선 누구든 집을 사려면 주택구입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 김씨는 탈세사실을 숨기느라 가슴졸이며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미국 국민이 국가에 청원서를 쓸 때 첫머리는 ‘성실한 납세자인 나는…’으로 시작한다. 세금을 냈으므로 정부에 무엇인가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역 주민 모임이 있으면 군수 경찰서장 등이 상석을 차지하는 한국과는 달리 세금을 많이 낸 순서대로 앞자리에 앉는다.

납세의무를 다한 미국 국민은 세금이 부당하게 쓰이거나 예산이 낭비되는 걸 알게 되면 서슴없이 이의를 제기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백악관 전화기를 대통령이 소속 정당의 정치자금 모금에 사용했다’고 의회에서 대통령을 무차별 공격하는 곳이 미국이다.

서양에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찾아오는 것이 죽음과 세금’이라는 속담이 있다. 세금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서양에선 확실하게 짜여진 규정에 따라 모두가 제대로 세금을 낸다는 전제가 굳건하죠. 그런 바탕이 있으니까 고액납세자와 부자들이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이성섭·李性燮 숭실대교수)

반면 우리는 정경유착 투기 등의 결과로 생겨난 부자가 많다보니 ‘깨끗한 부(富)’의 개념조차 약하다. 그러다보니 옥석(玉石)을 가리지도 않고 외제차만 보면 화를 내거나 부자라면 무조건 욕을 하고 보는 사람도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조세제도가 너무 복잡하고 허점이 많다”며 이를 정비할 것을 정책권고사항으로 제시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의 시각에서 보기에 한국은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원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사례를 보자. 미국 등 선진국은 대부분 개인별로 벌어들인 모든 소득을 하나로 묶어 세금을 부과한다. 어떤 소득이든 과세대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다.

반면 우리는 근로소득 이자소득 사업소득 등 소득성격에 따라 세금을 별도로 부과한다. 그러다보니 세법에 정해놓지 않은 소득은 무과세다. 복잡하기만 하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꼴이다. ‘돈을 번 것은 알겠지만 정해진 게 없으니 세금은 매기지 말라고 한다’는 게 국세청의 대답.

“세목(稅目)분류가 애매모호한 소득이 발생할 경우 과세할 근거가 없다”는 세무공무원의 말이 안타깝게 들린다.

미국은 조세법 시행령과 시행규칙마다 수십가지의 적용 사례를 만들어놓고 이를 완전 공개한다. 납세자들은 예시 중에 자기에게 해당되는 조항을 보고 세금을 내게 되고 세무공무원도 예시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면 된다. 담당자가 멋대로 하거나 누가 누구를 봐줄 여지가 그만큼 적다.

우리의 경우 예규 자체가 적고 널리 공개되지 않아 세무서를 찾아가야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과세가 이뤄지고 이는 정부 불신의 원인이 된다.

외국 국세청은 각종 조세정책 자료를 공개하고 국민으로부터 행정결과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 국세청은 세금을 매겨놓고도 거둬들이지 못한 체납액조차 공개를 하지 않는다. 공개하지 않는다는 법규정이 없는데도 기본 통계조차 밝히지 않는 국세청에 대해 경실련은 “정보공개법에 따라 관련 통계를 공개하라”고 요구해놓고 있다.

외국에선 탈세에 대한 처벌도 엄격하다. 미국은 조세포탈범에 대한 조세시효가 없다. 탈세자가 살아있다면 끝까지 따라가서 세금을 추징하겠다는 취지다. 또 미국 일본 대만 등은 세금을 내지 않고 미적거리다간 고율의 가산세를 맞게 된다. 은행금리는 연 3∼5%인데 가산세율은 20%나 된다.

우리 조세시효는 겨우 5년. 고의로 상속 증여세를 탈루한 경우만 15년이다. 그동안 들통나지 않으면 세금은 안내도 된다. 세금체납시 가산세가 10%로 은행 이자보다 훨씬 낮다. 세금 낼 돈을 은행에 넣어두었다가 이자를 받으면 가산세를 내고도 남는 장사다.

조세연구원의 현진권(玄鎭權)연구위원은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조세제도와 행정에 구멍이 많기 때문에 부(富)에 대한 편견이 생기고 부자를 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사람의 문제가 아닌 제도의 문제지요.”

부가가치세 신고때 과세특례제도가 대표적인 ‘구멍’이다. 부가세는 매출액의 10%를 내야 하지만 연간 매출액 4천8백만원 미만인 사업자에게는 매출액의 2%만 물린다. 따라서 연매출이 5천만∼1억원인 사업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과세특례로 남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업을 시작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사업가가 본격적인 ‘탈세(脫稅)수업’을 받게 되는 셈이다.

또 부가세가 있는 나라치고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에게 부가세를 과세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그런데도 최근 국회는 “전문직 종사자에게 부가세를 부과하면 결국 국민부담으로 전가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세금부과를 하지 않기로 해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성섭교수의 우려는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세법은 재산재분배와 국부마련이라는 원칙보다 정치논리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 왔습니다. IMF 신세를 지는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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