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지명관/되새겨보는 「3·1 민족주의」

  • 입력 1998년 2월 28일 19시 43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金素月)의 시 ‘초혼’의 첫 구절이다.

일제하의 모진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서의 버릇인지 나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의 ‘님의 침묵’에서 보듯이 님이란 그리운 여인만이 아니라 스승이기도 하고 겨레와 조국이기도 하고 드높은 이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왔다. ▼ 민족공동체 운명 위기에

소월은 이 ‘초혼’에서 ‘사랑하던 그 사람’을 읊으면서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라고 했다. 마치 황현(黃玹)이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물과 뫼도 찌푸렸다(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고 읊었던 것처럼 말이다.

3월이 오면 우리는 1919년 3·1절을 기다리면서 겨레와 민족주의를 생각하고 4월이 오면 1960년 4월19일 꽃잎처럼 떨어져간 젊음을 되새기면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 그 민주주의가 언제 활짝 꽃피우게 될 것인가 하고 한숨짓곤 했다.

이제 79주년을 헤아리는 그 날을 맞는 우리의 감회는 더욱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외환위기 때문에 나라가 온통 구걸을 해야 하고 물가는 뛰고 1백만, 1백50만명을 헤아리는 국민이 직장을 잃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축재를 한 사람들은 고금리로 늘어나는 자산에 미소짓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3월에 목메어 부르던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은 어디로 갈 것이며 민족적인 공동체는 어떠한 운명에 놓일 것인가.

사실 일제하에서의 조국과 겨레란 소월이 읊은 것처럼 ‘선 채로 이 자리에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었다. 그때는 가난했고 놀림을 받으면서 한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마음이 해방과 더불어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 것인가. 반세기의 정치적 우여곡절 속에서 그것은 산산이 부서지고 나와 내 당파를 위하는 대립만이 무성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민족주의란 다만 눌린 자의 감정에 근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고 생각되지만 풍요로운 사회를 구가하게 되자 세계화라는 구호를 타고 민족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은 시대착오의 환상인 것처럼 치부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의 국가적인 위기에 어떻게 우리가 민족을 떠난 우리의 삶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마치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있어서처럼 우리는 한 민족으로서 밖에서 다가오는 압력에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느냐 하는 과제 앞에 놓여있다. 민족적인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내부 분열을 일삼는다면 1세기 전에 맛본 실패와 비운을 되풀이하게 된다.

어떤 바깥세계가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하는 예견처럼 갈팡질팡할 것이 아니라 냉혹하리만치 우리가 스스로를 비판하면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 대립-증오의 감정 떨쳐야

3·1운동의 민족주의가 그리워진다. 그때 그것이 이민족 지배하에서 한에 서린 감정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민족의 삶을 그리려는 이성적인 민족주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가 되려는 감정이 사라지면 대립과 증오의 감정으로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뜻을 모아 정치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민주적인 민족주의 말이다.

그것은 결코 배타적인 것일 수 없고 3·1독립선언이 말하는 ‘동양평화’‘세계평화’에 이어지는 보편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새로이 발족한 ‘국민의 정부’ 아래서 정말 이러한 ‘대통합’‘대화합’을 이루어 낼 수만 있다면 3·1운동의 비원을 드디어 이룩했다고 역사는 크게 기록하리라고 생각한다.

지명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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