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 선비론/정약용]『하늘앞 모든 인간은 평등』

  • 입력 1998년 2월 5일 20시 28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의 실학적 세계는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거부하고 경전의 본래 정신과 시대적 변혁의 논리를 끌어내 경학(經學)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것이요, 동시에 민생의 고통을 직시하며 부패하고 잔혹한 봉건적 지배의 질곡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또한 안으로 중화(中華)주의에 매몰되었던 우리의 역사 지리 풍속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족문화의 정통을 발굴하는 것이며 밖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낡은 관습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가는 지성적 모험이었다. 18세때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실학적 문제의식을 어린 가슴에 심었던 그의 학문은 출발부터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험이었다. 28세때 문과급제로 벼슬길에 나갔지만 자신의 영달과 권세에 탐닉하지 않고 버려진 민생과 잊혀진 국법을 찾아내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연천지역을 돌아보던 33세때, 농민들의 참담한 궁핍상을 목격하고 지방관리의 탐학상에 분노하며 국가의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각성함으로써 실학의 눈을 크게 떴다. 다산의 평생에는 두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23세때(1784) 이벽(李檗)을 만나 천주교신앙과 서양과학에 빠져들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의 벽을 깨뜨리고 아득하게 넓고 눈부시게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게된 점이다.또 하나는 40세때(1801)부터 18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실이다. 강진의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에서 그는 방대한 경전을 주석하고 ‘목민심서(牧民心書)’등 경세론(經世論)의 대작을 저술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재(경기 남양주시 능내리)에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자신을 알아줄 다음 시대를 기다리며 한국사상사에 가장 방대하고 창조적인 업적을 완성하였다. 다산실학의 두 축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의 주석을 통한 그의 철학과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저술을 통한 경세론이었다. 그의 야심적인 경전주석 체계는 서학적 세계관으로 눈뜬 자신의 철학적 안목을 유교경전 해석에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실학사상을 획기적 수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동아시아를 통틀어 경학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주자를 넘어서 경전 자체로 돌아가자’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복고적 입장이 아니라 학문적 진실성을 위한 비판정신이며 도학체제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정신의 요청이었다. 그는 경전해석에 있어 청나라 고증학의 실증적방법을 중시했지만 사회현실을 외면한 맹목적 고증에 머물지 않고 실용의 목적을 추구하여 서학적 세계관까지 포함하는 독자적인 경학세계를 이루어냈다. 다산은 23세때 저술한 ‘중용강의’에서 유교의 천관(天觀)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천주교교리의 영향을 깊이 받아들였으니 서학을 섭취한 것은 유교사상의 파괴가 아니라 유교경전의 정신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다산은 비생산적 관념논쟁으로 끊임없이 분열하던 성리학의 무용함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 곧 인간존재의 현실성과 개체의 자율성에 주목, 새로운 인간이해를 자신의 철학적 근거로 정립했던 것이다. 다산은 또한 도덕성을 선천적인 성품으로 보는 성리학의 입장을 거부하고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중시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사회는 당파적 권력독점, 부패한 공직자의 탐학과 농간으로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면서 행정의 문란이 극도로 치닫고 있었다. 다산은 도탄에 빠진 민생의 참혹한 현실을 타오르는 울분과 눈물어린 연민으로 많은 시(詩)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통렬하게 고발했으며 사회제도의 개혁론을 치밀하게 구상하여 조선후기 실학의 경세론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다스린다(治)’는 것을 권력자의 지배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봉사행위로 해석하며 “하늘은 그 신분이 관리인가 백성인가 묻지 않는다”하여 하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주장하고 “나의 소망은 온나라 안을 모두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라 선언하여 봉건적 신분계급의 타파를 역설하였다. 또한 “수령(牧)이 백성(民)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수령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민존원리를 재확인하고 천자(天子)도 본래 백성 속에서 백성에 의해 추천된 존재라 하여 백성이 정치의 주체임을 강조하는 민권의식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재산을 고르게 하여 다함께 살리는 자는 임금과 수령 노릇을 제대로 하는 자이다”라며 분배의 균형을 요구하고 있다. 다산실학의 이상은 그의 시대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20세기초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 계몽사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 1백주년(1936)에는 민족사상과 근대사상의 발단으로 재평가되었다. 다산의 실학정신은 조선후기의 시대적 제약을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요, 특히 그의 사상이 간직한 동서(東西)의 사상을 종합하는 열린의식, 관념적 허위와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정신 및 대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오늘에 살려내야할 전통사상의 중요한 불씨이다. 금장태<서울대교수·종교학> ◇약력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성균관대대학원 박사학위 △성균관대교수 역임 △저서 ‘한국실학사상 연구’ ‘한국근대사상의 도전’ ‘유학사상의 이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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