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생 오영란(46·인천시청)은 28년째 실업무대에서 골문을 지키고 있는 여자핸드볼 선수다. 한번 나가기도 힘든 올림픽에 5번(1996·2000·2004·2008·2016년)이나 출전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처음 태극마크를 단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던 팀(대선주조)은 해체됐다. 1년을 쉬고 간 곳이 종근당이었다. 창단 멤버였다. 거기서 활약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어느 날 자신의 이름 석자가 대표팀 명단에 포함됐다. 후보 선수로 뽑혔지만 감지덕지였다. 그는 “다른 선수들처럼 내 꿈도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이 이뤄졌다”며 “비록 후보 골키퍼로 선발됐지만,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다 얻은 것 같았다”고 되돌아봤다.
하지만 후보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표선수만 되면 모든 게 술술 풀릴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기를 뛰지 못했다.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스탠드에서 응원했다.
“가장 속상했던 건 10골 차 이상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도 뛰지 못했을 때다. 아무리 후보라도 뛸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땐 많이 울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미안해 할까봐 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경기에 뛰고 못 뛰고는 내 노력에 달렸다며 선배들이 등을 두들겨 줬던 기억이 난다.”
그는 한 경기라도 뛰고 싶어 죽을힘을 다해 훈련했다. 주전이던 선배들도 악착같았다. 그러니 경쟁은 치열했다. 그는 “한번 차지한 주전을 내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 설움을 딛고 일어섰기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를 알린 대회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이다. 그는 덴마크와 결승에서 후반 종료와 동시에 허용한 7m 스로를 넘어지면서 막아냈다. 연장에서 지긴 했지만 그 선방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는 “내 자신이 뿌듯했던 시절”이라며 아울러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귀국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나더러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하더라. 잘난 척 했다는 얘기다. 어머니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 소리를 듣고 많이 울었다. 어머니는 부모니까 그런 지적을 해준다며 어깨 힘을 빼라고 거듭 말씀하시더라. 그때 겸손을 배웠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다.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배경이 된 대회다. 덴마크와 결승전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19번의 동점, 연장에 재연장, 그리고 승부던지기. 결국 2-4로 졌지만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은메달이었다. 하지만 오영란에게는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아픈 기억이다. 지고 난 뒤 라커룸에 가서 많이 울었다. 너무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내가 하나만 더 막았더라면…’ 하는 미안함이 컸다. 또 감독님에게는 죄책감도 들었다. 최후방을 지킨 내가 더 도와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우리는 그 때를 떠올리며 금메달 같은 은메달이라고 한다. 또 최고의 감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2등은 2등이다. 그 값어치는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도 우생순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후배들은 반드시 정상에 올라 감동을 줬으면 한다”고 했다.
오영란은 2년 전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에 섰다. 44세에 리우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오랜 은사인 임영철 감독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또 후배들을 돕고 싶었다. 그는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감독님은 진지했다. 그래서 믿고 따랐다”고 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에겐 올림픽 금메달이 없다. 그동안 은 2개와 동 1개를 목에 걸었다. 금을 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은퇴 얘기를 꺼내기 미안했다. 하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여서 언제까지 뛸지가 궁금했다.
“현재 소속팀 감독님이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다. 그래도 깍듯이 대한다. 선수들 앞에서는 특히 조심한다. 은퇴도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이다. 언제까지 뛴다기보다는 한 해 한 해 스스로 컨트롤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다. 1년을 소화하면 또 다음 1년이 기다린다. 열정이 없어지면 모를까 열정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계속 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