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판독, ‘보이지 않는 손’에 악용될 수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4일 15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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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칼럼

왕년의 축구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게 ‘신의 손’이다. 마라도나는 1986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상대 팀 골키퍼와 공중 볼을 다투다 손으로 툭 쳐서 골을 넣었다. 그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그 손은 내 손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손’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궤변이 없다. 당시 많은 관중과 선심은 마라도나의 ‘핸드볼 골’을 목격했지만 시야가 가려 이를 보지 못한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2018 러시아 월드컵처럼 비디오판독(VAR·Video Assistant Referees)이 시행됐다면 핸들링 반칙 선언은 물론 퇴장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4분 뒤 마라도나가 터뜨린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골’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라도나는 5명의 잉글랜드 수비수 사이로 60m 정도를 질주하는 현란한 드리블로 골키퍼까지 제치고 두 번째 골을 넣어 2-1 승리를 주도했다. 이 대회에서 5골과 5어시스트를 기록한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를 우승까지 이끌었다

러시아 월드컵은 VAR가 도입된 첫 월드컵이다. ‘마라도나의 추악한 손’ 등과 같은 비신사적인 행위를 적발해 내고 오심을 줄인다는 게 그 취지다. FIFA는 “조별리그 48경기에서 심판이 놓친 14건의 판정을 VAR로 바로 잡은 덕분에 정확도가 99.3%에 달했다. 판정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VAR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는 뭘까. VAR 신청 권한이 정작 해당 팀에는 없기 때문이다. 주심과 부심, VAR 심판진만 VAR을 시행할 수 있다. 한마디로 VAR도 여전히 ‘심판 놀음’이라는 결론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 26일 B조의 16강 진출 팀이 가려진 포르투갈-이란(1-1), 스페인-모로코(2-2) 경기였다. 두 게임에서 총 4차례 VAR이 실시됐고 16강행 티켓은 호날두의 포르투갈, ‘무적함대’ 스페인이 차지했다. 각본이라도 짠 듯, 두 팀 나란히 승점 5점(1승2무).

특히 스페인은 1-2로 뒤진 후반 추가시간에 넣은 극적인 동점골이 처음엔 오프사이드 반칙 노골로 선언됐지만, 곧바로 VAR를 통해 골로 인정받았다. 반면 이 경기에서 스페인 수비수 피케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명백한 핸들링 반칙을 범했지만 주심은 VAR은커녕 휘슬도 불지 않았다.

모로코는 조별리그 2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0-1로 뒤진 후반 상대 수비수 페페의 페널티 박스 안 핸들링 때 VAR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 VAR의 최대 희생양은 모로코다. 이와 관련 외신들은 “대회 흥행에 도움이 되는 국가에 더 유리하게 VAR를 시행하는 게 아니냐”며 VAR 편파성 의혹을 잇달아 제기했다.

VAR로 상세히 들여다 본 축구는 ‘의외로 지저분하고 오심 가능성이 도처에 널린 스포츠’였다. 특히 문전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몸싸움은 핸드볼의 격렬함을 뺨칠 정도였다. 클로즈업된 슬로 장면을 보면서 치열함을 넘어 치사함마저 느껴졌다. VAR를 의식해 자제(?) 했는데도 그 정도라면 과거 월드컵에서는 오죽했으랴. 어처구니없는 오심 또한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VAR 도입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하지만 러시아 월드컵에서 시행되고 있는 형태의 VAR은 보완이 필요하다. 그 핵심은 해당 팀 감독에게도 VAR 신청 권한을 주는 것이다. 기회의 공평성이 담보되지 않은 VAR은 결코 공정한 제도가 아니다. 흥행(수익)을 최우선시하고 출전 국가 중 주요 FIFA 스폰서 팀을 배려하려는 FIFA의 ‘보이지 않는 손’에 ‘교묘한 면죄부’로 악용될 소지가 농후하다. 경기 흐름이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선 VAR의 공정성을 부각시킬 목적의 ‘물타기 VAR’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도는 문제점이 발견됐으면 고치면 된다. FIFA가 과연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땐 공정성 시비를 잠재울 수 있는 VAR를 실시할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애초에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FIFA는 이번 러시아 월드컵부터 출전 팀에도 VAR 신청 기회를 줬을 것이다. FIFA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을 포기할 의사가 추호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안영식 전문기자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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