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히딩크와 퍼거슨, 그리고 현명한 박지성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10월 26일 05시 30분


선수로서 한국축구를 빛냈던 박지성은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의 길을 택했다. 두 은사였던 히딩크와 퍼거슨 감독처럼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일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수로서 한국축구를 빛냈던 박지성은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의 길을 택했다. 두 은사였던 히딩크와 퍼거슨 감독처럼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일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축구의 아이콘’ 박지성(36)은 그동안 두 번의 은퇴식을 했다.

첫 번째는 2011년 1월 아시안 컵을 마친 뒤였다. 2002년과 2006년, 2010년 월드컵을 통해 팬들에게 축구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그는 11년간 가슴에 달았던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게 자신이 할 도리라고 했다. 그렇게 뜨거운 박수 속에 떠난 태극전사는 이전엔 없었다.

2014년 5월에는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일본,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로무대에서 맹활약한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릎이 좋지 않았다. 무리를 해가며 뛰고 싶지 않다는 게 은퇴 이유였다.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시즌을 보내며 각종 우승을 이끌었던 그는 아시아 축구의 자랑이었다.

두 번의 은퇴를 하면서 덩달아 부각된 인물이 거스 히딩크 감독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다. 히딩크는 2002한일월드컵 때 한국대표팀을 이끌며 ‘흙 속의 진주’박지성을 발탁했고, 이후 유럽무대로 이끈 축구인생의 은인이다. 박지성은 자서전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적어도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가 세 번쯤 온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이 그런 것 아닐까’라고 썼다. 그만큼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박지성-퍼거슨 전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박지성-퍼거슨 전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맨유의 전설적인 감독 퍼거슨은 박지성을 선수로서 정점을 찍게 해준 지도자다. 2004~2005시즌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던 박지성에게 꽂힌 퍼거슨은 직접 전화를 걸어 이적을 설득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 또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두 감독은 박지성의 성격이나 플레이 스타일, 팀에서의 역할 등을 꼼꼼히 따졌을 것이다. 궂은일을 하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성품이나 성실한 자세, 폭넓은 활동량, 강인한 투쟁심, 큰 경기에 강한 대담함 등에 높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그런 감독들의 판단이 오늘날의 박지성을 만들었다.

명장들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선수의 발탁, 훈련, 실전, 관리 등 세계 최고의 감독들만이 가진 능력을 곁에서 보고 배웠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자산이다. 한국축구 입장에서는 박지성이 히딩크나 퍼거슨처럼 큰 지도자로 컸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만하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를 할 생각이 없다고 못 박았다. 대신 행정가를 꿈꿨다. 지도자의 길을 포기한 이유가 이번에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그는 “히딩크와 퍼거슨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박지성은 25일 일본 야후재팬에 공개된 인터뷰에서“행정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유럽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다. 어떻게 축구 행정가 일을 시작할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있다. 구단이나 대한축구협회 같은 국가 협회, 혹은 AFC 같은 국제단체 등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 중이다”고 밝혔다. 그는 7월 국제축구연맹(FIFA) 마스터 코스 과정을 마쳤다.

그러면서 지도자의 꿈을 접은 것에 대해 “감독은 36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트레스가 끊이지 않는 직업이다. 오히려 히딩크 감독과 퍼거슨 감독 같은 명장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에게는 지도자라는 직업이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좋은 감독이 되려면 전술도 중요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상황을 즉시 파악해서 선수들의 의욕을 끌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호통으로 선수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분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히딩크 감독이나 퍼거슨 감독처럼 할 수 없다. 나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최근 K리그 부산 아이파크 조진호 감독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감독의 스트레스에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하는 외로운 직업, 성적에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감독은 박지성이 생각하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이런 박지성의 현명함에 새삼 놀란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대표팀을 은퇴했을 때나 팬들에게 더 이상 좋은 플레이를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아 선수 유니폼을 벗을 때의 의연한 모습, 그리고 지도자의 화려함보다는 자신의 성향과 기질을 파악하면서 앞날을 개척해가는 현명함에 ‘큰 선수는 다르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소명처럼 받드는 모습에서, 그리고 겉멋 들지 않은 행동에서 박지성이 은퇴 이후에도 존경 받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의 한국인 첫 주자로 나선 박지성이 순박하게 웃는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그리고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축구뿐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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