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 물러진 빙판 힘으로 치고나간 ‘모터범’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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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초’ 무엇이 갈랐나
경기 지연돼도 안흔들린 ‘강심장’ 대담한 성격에 컨디션 조절 능숙
2차때 강자 피한 ‘행운의 조편성’ 하락세 노장 마주쳐 자신감 충전
미니홈피엔 “성공이라는 못을 박으려면 끈질김이라는 망치가 필요하다”

모두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한국이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모태범(21·한국체대)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주종목이 1000m인 모태범은 16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태극기를 휘날렸다. 이규혁(서울시청)과 이강석(의정부시청)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모태범은 어느 종목에서도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선수. 게다가 이날 경기 흐름은 누구보다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렀다. 모태범의 ‘깜짝 우승’ 배경을 분석했다.

○ ‘최악의 빙질’ 힘으로 눌렀다

리치먼드 올림픽오벌은 ‘슬로벌(slowval)’이란 악명을 얻었을 정도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해발 4m의 저지대에 있어 기압 탓에 얼음의 활도(미끄러짐)가 떨어진다. 여기에 1차 시기 10조(전체 20조)까지 경기를 마친 뒤 얼음을 다듬는 시간에 정빙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몇 차례 물을 뿌리면서 활도가 더 나빠졌다. 후반부에 출전한 선수들은 빙질이 전반부와 다르다며 항의했지만 후반부(13조)에 출전한 모태범에게 나쁜 빙질은 되레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관규 감독은 “모태범은 중장거리 전문이라 힘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다. 덕분에 빙질이 물러도 파워를 앞세워 박차고 나갈 수 있었다. 스케이팅 기술이 좋은 이규혁이 메달권에 들지 못한 것은 정빙기 사고 탓이 컸다”고 말했다.

○ ‘늘어진 경기시간’ 각오 다졌다

정빙기 고장으로 10조 이후 선수들은 1시간 3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1차 조 편성은 세계 랭킹 등을 참조해 8명씩 그룹을 나눈 뒤 하위 그룹부터 조를 추첨한다. 우승 후보들은 대부분 뒤 조에 배치된다. 많은 우승 후보가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는 동안 모태범은 마음 편히 각오를 다졌다. 모태범이 “1차 기록을 보고 나도 믿지 못했다”고 했던 데에는 흔들린 경쟁자들이 있었던 것. 1차에서 34초92로 2위를 했던 모태범은 2차에서도 34초90으로 제 페이스(2위)를 지켰다. 모태범은 평소 악바리로 통한다. 회식 자리에 닭 가슴살을 따로 가져가 먹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오토바이와 스포츠카를 즐겨 타는 스피드 마니아에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등 두려움과도 거리가 멀다. 그는 “감독님이 상황을 계속 알려주셨다. 적당히 몸을 풀고 쉬다가 음료수를 마시기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의 미니홈피(www.cyworld.com/bum911)에는 이런 문패가 달려 있다. ‘성공이라는 못을 박으려면 끈질김이라는 망치가 필요하다.’ 끈질긴 모태범에게 1시간 30분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 ‘2차 조 편성’ 기 더 살렸다

500m 선수들은 2차례 경기를 한다. 예전에는 한 번의 레이스로 메달을 가렸지만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부터 인코스와 아웃코스에서 한 번씩 출발해 기록을 합산하는 방식이 됐다.

모태범은 1차 시기에서 2위를 하고도 2차 시기 챔피언 조(20조)에서 뛰지 못했다. 챔피언 조는 ‘1차 인코스 1위+1차 아웃코스 1위’로 구성된다. 모태범과 포우탈라 모두 1차에서 인코스 출발이었기 때문에 둘 중 기록이 뒤지는 모태범이 19조로 밀린 것. 그러나 세계 랭킹 3위이자 1차에서 100m 구간을 9초55에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던 27세의 포우탈라를 피해 제러미 워더스푼(34·캐나다)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단거리에서는 스타트가 승부를 좌우한다. 만일 모태범이 포우탈라와 맞붙어 초반에 뒤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포우탈라는 2차에서 가토 조지(일본)에게 100m 구간부터 뒤지며 페이스가 흔들리는 바람에 최종 순위가 5위까지 밀렸다.

워더스푼은 2007년 이 종목 세계기록(34초03)을 작성한 캐나다 빙상의 간판. 그러나 명성에 비해 하락세가 뚜렷한 노장은 새로운 스타의 제물이 될 운명이었다. 그가 세계 기록 보유자라는 사실은 모태범의 투지를 더욱 불태웠다. ‘100m 구간만 먼저 통과하면 세계 기록 보유자도 이길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던 모태범은 100m를 9초61에 끊었고 워더스푼은 9초69에 그쳤다. 모태범은 “생각대로 되면서 더 자신감이 붙었다”고 말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 다시보기 = 모태범, 한국 빙속 사상 첫 번째 금메달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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