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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5월 22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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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50m)에서도 악명 높은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며 한국 산악사를 새로 쓴 그날 밤. 산악인 박영석 대장(46·골드윈코리아 이사)에게 잘 잤냐고 물었더니 “혼절 상태로 쓰러졌다”며 웃었다.
그럴 법도 했다. 20일 0시 40분(한국 시간 오전 3시 55분) 캠프5(8400m)를 출발한 그는 꼬박 14시간 20분을 걸어서 오후 3시 정상에 도착했다. 간간이 무전기를 통해 들리는 그의 음성은 “죽겠다” “내가 이 나이에…”였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정상에 섰다. 그리고 다시 5시간을 걸어 남동릉 루트 캠프4(7800m)에 친 텐트 안에 쓰러져 잠들었다. 20일 하루 동안 19시간 20분을 걸은 것이다.
21일 오후. 하산 길에 무전기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음성에는 다소 생기가 느껴졌다. “한숨 푹 자고 나니 살 것 같다. 하지만 근육이 파열됐던 왼쪽 종아리에 통증이 여전해 오른손, 오른발에 힘을 주면 경련이 생길 것만 같다.” 박 대장은 21일 베이스캠프(5364m)까지 내려올 예정이었지만 몸 상태가 안 좋아 캠프2(6500m)에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전날 등정의 어려움을 묻자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남서벽에 올라섰지만 서릉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전쟁, 전쟁 그 자체였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쏟아지는 총탄같은 낙석과 날카로운 절벽. 대원들이 입은 ‘원피스’(상하 일체의 고산등산복)는 칼날 같은 돌부리에 창호지처럼 찢어졌다. 박 대장은 “지금 걸을 때마다 원피스 속에 있던 오리털들이 풀풀 날리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이미 다음 도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앞으로 10년 내에 히말라야 14좌에 모두 코리안 신루트를 내고 싶어요. 내년 봄 마칼루 서벽부터 차례로 도전할 생각입니다.”
10년 후면 박 대장은 56세가 된다. 8000m 이상 고산에 오르기는 무리인 듯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다 정상에 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훌륭한 후배들이 제 원정대에는 많이 있어요. 제가 오르지 못해도 그들이 오르면 코리안 신루트는 완성되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그는 잡음이 심한 무전기가 꺼지기 전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다.
“많은 분들이 원정대 홈페이지에 응원 글을 남겨주셨어요. 글을 읽으면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도전 성공이 여러분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하켄 60개 박고 자일 3500m 연결 ‘순도100% 신루트’▼
■ 남서벽 코리안 루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