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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월 8일 1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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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 : 영하 25.8℃
풍속 : 초속 3.7m
운행시간 : 08:45-20:05 (11시간20분)
운행거리 : 30.0km (누계 :922.5km)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 207.6km
야영위치 : 남위 88° 08.488′ / 서경 81° 48.898′
고도 : 2,613m / 89도까지 남은 거리: 96.6km
▼남위 88도 돌파!▼
탐험출발 이후 가장 추운 기온이다. 어제의 무리한 운행으로 지친 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날씨가 추우니 서둘러 준비해서 빨리 출발하자"는 박대장의 말에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캠프철수를 마친다. 이현조 대원이 마지막으로 텐트를 썰매에 넣을 즈음 박대장은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 후, 뒤를 한번 돌아보고 "가자"는 한마디와 함께 앞으로 내달린다. 08:45. 동쪽하늘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빠르게 하늘을 뒤 덮고 있다. 화이트 아웃을 염려한 박대장은 "남쪽으로, 가능한 빠르게, 휴식없이 운행한다"고 출발 전 대원들에게 말했었다.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마친 이현조 대원과 촬영을 끝낸 이치상 대원은 멀리 달아 난 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따라잡으려면 한나절은 걸리겠다'며 출발을 서두른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하늘은 몰려 온 구름으로 뒤덮였다. 화이트 아웃이다. 12일 만에 온 화이트 아웃이니 그 동안 좋은 날씨가 탐험대에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순식간에 밀려 온 구름이지만 지독한 정도는 아니다. 발밑 설원의 윤곽이 보이니 그 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루트를 찾아야하는 박대장에게는 반갑지 않은 화이트 아웃이다. 가능한 직선으로 길을 잡는데 오늘은 갈지(之)자 운행이다. 운행 시작 4시간 만에 휴식과 함께 간식을 먹는다. 13:00. 차가운 바람 때문에 바람을 등지고 스키를 그냥 신은 채 서서 간식을 먹는다. 스키를 벗고 신는 것이 추울 때는 더없이 귀찮다. 먹고 나니 다시 운행시작이다. 말없이 앞서는 박대장과 역시 말없이 뒤를 따르는 대원들. 말하는 것도 귀찮은가 보다. 두 시간을 더 걷고 다시 휴식. 15:00. 뒤따라오는 대원들을 기다리며 박대장이 주머니에서 GPS를 꺼내본다. "와"하는 탄성과 함께 "88도를 넘었다"고 크게 외친다. 대원들은 생각지 않은 일이 일찍 온 것에 지친 것을 잠시 잊는다. 뒤처진 대원들이 도착 할 무렵 박대장은 다시 출발한다. 헉헉거리며 이제 막 도착한 대원들에게 이치상 대원이 방금 88도를 넘었다고 알려주자 표정이 환해진다. 그 소식에 힘이 난 듯 대원들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앞서간 박대장을 이내 뒤따른다.
<카운트 다운(count down)! -8>
남위 84도를 넘을 무렵의 일이다. 하루 운행거리가 30km를 오르내리자 강철원 대원이 휴식시간에 박대장에게 말했다.
"하루 34km씩 운행해서 20일 만에 끝내 버리죠?"
이 말이 있은 다음날 화이트 아웃과 블리자드가 연거푸 몰려와서 이틀간 운행거리가 21.5km로 뚝 떨어졌다. 그 후로 박대장은 대원들에게 입 조심, 말조심을 거듭 당부했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남극의 여신을 화나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탐험대는 남극 여신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날씨가 계속 좋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운행한 것. 2주전쯤부터 내리 하루 30km이상씩을 걸었고 대원들은 피로가 누적되어 지치고 힘들어했지만 특별히 운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부상자가 없다. 87도를 넘으면서부터 박대장은 내심 극점 도달 예상일을 1월15일 전으로 생각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 길 망설였다. 꾹 참다가 88도를 넘으면 자신 있게 말하자고 참아왔다. 그리고 오늘 탐험대는 남위 88도를 넘었다. 박대장은 카운트 다운을 공식적으로 말했다. 남은 207km 동안 어떤 일이 생겨서 탐험대의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화이트 아웃 속에서 운행을 하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예상 도착 일을 13일, 늦어도 14일로 잡는다. 이럴 경우 45일 내지 46일 만에 남극점에 도달한다는 얘기가 된다. 탐험대는 당초 남극에 올 때 극점도달 기간을 55일에서 60일로 잡았었다. 하루라도 빨리 극점에 도달하기를 대원들은 모두 원했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걸었다. 그 결과 38일째인 오늘 극점을 불과 207km 남긴 상황에서 도보에 의한 무지원 남극점 도달 최단기간 신기록이 눈앞에 다가왔다.
1911년 아문젠이 남극점을 밟은 이래 탐험가들은 극점 도달기간을 단축하는데 열을 올렸다. '가장 짧은 기간에 극점을 밟는 일'은 일반 대중들의 각광을 받는다. 1994년 한국의 허영호 대장이 이끄는 4명의 대원은 패트리어트 힐을 출발하여 44일 만에 극점에 도달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남극점 도달을 위한 출발점으로 패트리어트 힐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이다. 패트리어트 힐로부터 50여km 떨어진 허큘레스가 버크너섬과 함께 통상적인 남극점 도보탐험의 출발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해발 242m의 허큘레스로부터 해발 830m의 패트리어트 힐까지는 썰매를 끌고 3일이나 4일(썰매의 무게가 좌우)이 걸리고 표고차도 600m에 이르니 그럴 법도 하다. 같은 해 2인조 여성 탐험가(리브 안센외 1명)는 50일 만에 무지원으로 남극점을 밟게 되고, 연도는 알 수없지만(현재 탐험중이므로) 프랑스의 티에리 볼로 등 5명은 버크너 섬을 출발하여 49일 만에 남극점을 밟는다. 이 기록이 남극점 도보 무지원 최단기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면 이번 남극점 탐험대의 예상되는 도달기록은 새로운 기록으로 남게 된다. 만약 대기록이 달성된다면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꼭 세계가 놀랄 대기록을 달성 하겠다'는 탐험대원들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우리는 할 수 있고, 우리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걸고 꼭 해낼 것이다.
D-8, 어쩌면 D-7. 탐험대의 어깨에 달려있는 대업이 어디 탐험대만의 일인가. 국민들의 열화 같은 '격려 메시지'야말로 탐험대에게 가장 큰 힘이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극점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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