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일’. ‘사건’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사건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법조팀 기자들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이야기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다단계와 유사수신(類似受信)의 무서움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가족을 겨눌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들어선 불법 피라미드의 입구 반대편은 어쩌면 이번 생의 낭떠러지가 될지 모른다. 이들의 범죄망을 피해 갈 방법은 없을까. 전국의 다단계와 유사수신 범죄가 몰리는 ‘민생경제’ 전담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부장검사 정현) 검사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주변에 권하는 순간 유사수신 공범
유사수신이란 허가받지 않고 등록되지 않은 개인 또는 업체가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누군가로부터 “원금 보장”, “O개월 동안 OO%의 수익 보장” 등 혹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신은 이미 타깃선상에 놓였다. 투자 초반 ‘미끼’ 수익을 얻고, 주변에 권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제 공범이다. 고아라 부부장검사는 “부모, 자식, 친인척이 모두 공범으로 입건되는 경우도 있다”며 “가족에게 권유하면 유사수신 공범으로 입건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범행은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진다. 6개월부터 최대 1, 2년 사이에 수천, 수만 명의 피해자로부터 수천억 원대 수익을 거둔다. 과거 면대면 방식으로 이뤄졌던 범행은 이제는 오픈 채팅, 유튜브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노린다. 러시아 재연 배우가 외국계 회사 대표로 둔갑하기도 하고 온갖 화려한 기술이 동원된다. 남녀노소와 지식의 고하를 가리지 않아 가정주부부터 대학교수까지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실제 피해자가 된 사례도 많다.
기록을 검토하고 있는 형사4부 검사들. 좌측 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아라 부부장검사, 조미경 검사, 안미현 검사, 김현빈 검사, 박혜진 검사, 유광선 검사.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지난해 형사4부가 재판에 넘긴 P 사의 경우 약 6개월 동안 1173억 원의 투자금을 챙겼다. 이들은 AI 자동 매매로 24시간 투자가 가능하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과 비슷하게 생긴 자체 프로그램에서 실시간 거래가 이뤄지는 모습을 선보였다. 한동안 수익도 정상 지급됐지만, 어느 순간 뚝 끊기는 전형적인 범죄 패턴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자신과 지인의 돈을 모두 끌어모아 투자했던 20대 여학생이 목숨을 끊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중에서는 대학교수도 있었다.
이런 끔찍한 결말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형사4부 수석검사인 조미경 검사는 “일확천금을 노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 검사는 “은행 적금 연이자율이 3, 4%인데 월 18% 수익이라고 하면 투자자들도 사기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며 “고수익 상품들은 실체가 있는지 잘 확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형사4부 검사들이 건네는 범죄예방 Tip〉
1. ‘원금보장’에 속지 않기
2. 높은 수익률을 믿지 않기
3.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서 인가된 투자 업체인지 확인하기
4. 금융정보분석원 홈페이지에서 가상자산업자 신고현황 확인하기
●신속 수사로 추가 피해 막은 휴스템코리아 사건
휴스템코리아 사건은 형사4부가 최근 재판에 넘긴 사건 중 가장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다. 수사팀이 특정한 범죄수익 규모는 3조3000억 원대에 달한다. 현재까지 구속 기소한 피고인은 7명으로, 약 70명의 피의자에 대한 수사도 한창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집계된 피해자 수만 약 10만 명에 달하지만 수사 초기 상황은 지금과 좀 달랐다. 당시 한창 규모를 키워가던 휴스템코리아의 영업 방식에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피해자가 없었던 것. 돈을 못 받은 피해자들의 고소로 시작되는 여타 유사수신 사건과는 달랐다.
유광선 검사는 “워낙 돌려막기도 잘 되는 상황이어서 당시 대표 이모 씨에 대한 강제수사에 착수할지 말지를 고민했다”며 “회사 측에서도 ‘멀쩡한 회사를 괜히 건드려서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키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지만, 기록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명백한 범죄로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 검사는 “1심 법원도 판결문에서 ‘대표가 구속되면서 추가 피해가 더 이상 없었다’는 취지로 판시해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기록으로 가득 찬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 조사실. 책상 위와 캐비닛을 가득 채운 130여 권의 기록들은 모두 한 사건 관련 수사기록이다. 페이지수로는 6만5000페이지 이상 된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휴스템코리아 이 대표 등은 다단계 조직을 이용해 농축수산물 거래 등을 가장하는 방법으로 10만 명으로부터 회원가입비 명목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이 대표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은 상태다.
형사4부는 휴스템코리아 외에도 4000억 원대 유사수신 사건인 아도인터내셔널 사건과 관련해 12명을 구속 기소하는 등 총 20명을 재판에 넘기고, 100명에 대한 추가 수사도 진행하고 있다. 5000억 원대 투자금을 편취한 기획부동산 사건인 케이삼흥 사건에서도 3명을 구속 기소하고, 19명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 형사4부는 ‘코인 스테이킹(예치)’ 사기로 5000여 억 원을 가로챈 와콘 사건과 관련해서도 약 40명을 수사하고 있다. 유사수신 사건의 특성상 피의자와 피해자 모두 더 늘어날 수 있다.
●형사4부 아닌 형사사(死)부
형사4부 검사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산(山)처럼 쌓인 기록에 압도당한다. 피해 액수, 피의자와 피해자 수도 다른 형사 사건보다 많은 편이지만, 기록의 양은 일반 형사 사건에 비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 권에 대략 500페이지 정도 되는 사건기록이 한 사건당 적게는 40~50권, 많게는 130권, 페이지수로는 6만5000페이지 이상 된다. 조 검사는 “유사수신 사건의 특성상 한 번 기소된다고 끝이 아니라 추가로 연달아서 오는 사건들이 굉장히 많다”며 “주범들의 사건이 끝나면 중간 모집책, 하위 모집책 관련 사건들이 몇십 건씩 들어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기록들을 검토하고 있는 정현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 부장검사. 송유근 기자 big@donga.com피의자와 피해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건이 빨리 처리되기만을 바란다는 점이다. 수많은 기록과 빠른 사건 처리를 바라는 민원 속에서 검사들의 퇴근 시간은 점차 미뤄진다. 퇴근을 못하는 날도 부지기수다. 가족이 지방에 있는 검사들도 주말 내내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건 처리에 매진했다. 간이침대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눈을 붙이던 게 이제는 침낭 생활로 이어졌다. 안미현 검사는 “고아라 부부장검사와 관사 ‘룸메이트’인데 지난달 두 사람이 모두 관사에서 자고 출근한 날이 단 하루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주요 사건 처리가 많은 연말은 더 바쁘다. 박혜진 검사는 지난 연말 주말에도, 크리스마스에도 검사실로 나와 기록들을 살폈다. 박 검사가 연말연초 주말에 출근을 하지 못한 날은 5일 서울에 폭설이 내렸을 때가 유일했다. 박 검사는 “아직 미혼이라 주말에 일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형사4부의 막내이자 초임 검사인 김현빈 검사도 주말 근무에 익숙해지고 있다. 경찰 출신인 김 검사는 경찰에서도 유사수신 등을 수사하는 경제범죄수사팀에서 근무했다. 김 검사는 “검사가 돼서도 이런 피해 큰 범죄를 근절하는 데 좀 역할을 담당하고 싶었는데 부서가 마침 적절하게 배치된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극악의 업무강도에 검사들 사이에선 형사4부가 형사사(死)부로 불리기도 한다. 검사도, 검찰 수사관도 지원하지 않는 기피 부서가 된 지 오래다. 외부에서 가장 응원받는 부서가 검찰 내부에선 격무로 인해 비인기 부서가 된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인근에는 사시사철 형사4부를 응원하는 사기 피해 근절 관련 단체들의 현수막과 피켓이 늘어서 있다.
정현 부장검사는 “유사수신 사건의 경우 초기 대응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피해자 수도 많고 민생을 침해하는 범죄인 만큼 수사인력도 보강되고, 검사들이 보람있게 일할 수 있는 해결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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