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한 맛 유튜브 끄고 ‘도파민 단식’ 12시간… 슴슴한 곰탕이 느껴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3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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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본보 기자의 ‘도파민 단식’ 체험기

휴대전화와 작별한 지 30분.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업무 연락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도 잠시, 일종의 ‘금단 증상’이 찾아왔다. 분명히 휴대전화를 끄고 상자 깊숙한 곳에 넣어놨는데 어디선가 ‘카톡!’ 하는 알림이 온 듯한 환청이 느껴졌다. 진동이 울린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기도 했다. 18일 전자기기 사용을 중단하고 ‘도파민 단식’에 나선 기자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도파민은 쾌락을 느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문제는 ‘질 나쁜’ 도파민에 빠져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짧은 영상 위주의 쇼트폼 콘텐츠를 시청할 때가 대표적이다. 손쉽게 분노와 기쁨을 느끼며 도파민이 빠르게 분출되고, 이를 중단하면 우울과 불안이 밀려오면서 큰 자극을 찾게 되는 악순환이다.

휘발성 자극을 모두 끊고 그 시간을 독서나 산책으로 채우면 몸과 마음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본보 기자가 이날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 동안 도파민 단식에 나선 건 이런 이유였다.

스마트폰 끈 지 10분 만에 ‘카톡’ 환청… 익숙해지니 ‘물멍’도 즐거워

스마트폰-커피-술 멀리하기 도전… 무료함에 독서-청소 등 할일 찾아
짧은 영상으로 얻는 ‘즉각 보상’… 우울-불안 쫓으려 더 큰 자극 불러
중고생 32% “하루 8시간 스마트폰”… 최근 ‘전자기기 금지’ 카페 생기고
중독 청소년 대상 캠프도 등장… “자극 멀리하기, 짧게 해도 효과”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18일 오전 7시. 기자는 휴대전화와 태블릿 PC, 노트북 등 모든 전자기기의 전원을 껐다. 커피와 술, 탄산음료, 패스트푸드 등 자극적인 식단도 멀리하기로 다짐했다. 특히 휴대전화의 ‘전원 끄기’ 버튼을 누를 때가 생경했다. 입사 이후 줄곧 언제 캡(사건팀장)이 전화할지 몰라 단 1초도 휴대전화를 꺼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체험 취재’라는 명분으로 휴대전화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으니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이날 오후 7시까지 12시간 이어질 기자의 ‘도파민 단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 생경했던 고요, 익숙해지자 ‘벽돌 책’도 술술

오전 7시 10분.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강아지들 보고 싶네….’ 퇴근하고 나면 2시간씩 강아지가 뛰어노는 동영상을 보며 ‘동물 멍’을 때린 습관도 떠올랐다. 전원이 꺼진 휴대전화를 잠시 꺼내 손에 쥐어 보기도 했다.

한 유통업체에 따르면 올 1월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의 유튜브 사용 시간은 한 달 평균 40시간으로 5년 전보다 19시간 늘었다. 교육부의 ‘2022년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에서 중고교생 31.6%는 주말에 하루 8시간 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고 답했다. 업무 연락이나 인터넷 강의를 위해서라며 우리는 그간 스마트폰에 너무 많은 곁을 내주고 살아온 건 아닐까.

오전 7시 40분. 허전함을 덜기 위해 자취방 안을 빙빙 돌며 걷자, 평소에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 이렇게 얼룩이 많았나? 명함은 언제 이렇게 쌓여 있었지?’ 기자는 이곳 원룸에 입주한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손걸레를 빨아 창문을 청소했다. 또 수습기자 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명함도 직종별로 분류했다. 총 132장이었다.

기자가 900쪽이 넘는 에밀 루트비히의 '나폴레옹'을 읽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사에 관심이 생겨서 사뒀지만 자꾸 눈이 휴대전화로 가서 하루 10쪽도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은 2시간 동안 124쪽이나 읽었다. 사진은 미리 설치해둔 스마트폰의 저속촬영(타임랩스) 기능으로 찍었다.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오전 9시 30분. 짧은 동영상에 밀려 손을 대지 않았던 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었다. 고전(古典) 읽기였다. 지난해 사놓고도 909쪽의 분량 탓에 포기했던 에밀 루트비히의 책 ‘나폴레옹’을 책장에서 꺼냈다. 평소 10쪽도 못 읽고 휴대전화로 시선이 옮겨가곤 했다. 이날 기자는 책을 펼친 지 2시간 만에 124쪽을 읽었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오전 11시. 출출해졌다. 전자기기만큼 끊기 힘든 게 ‘고자극’ 음식이었다. 평소 습관처럼 찾았던 과자와 탄산음료가 생각났다. 칼칼한 컵라면 국물도 간절했다. 하지만 신중하게 고른 이날의 점심 메뉴는 맨밥과 건더기 없는 레토르트 사골곰탕이었다. 유튜브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없이 ‘혼밥’을 하려니 어색했다. 하지만 곰탕 맛에 집중하니 뜻밖에 슴슴하니 깊은 맛이 느껴졌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연구팀에 따르면 TV를 보면서 식사하면 음식의 맛이나 양에 신경을 덜 쓰는 탓에 비만할 위험이 40% 증가한다고 한다. 식사 중 스마트폰 사용은 오죽할까.

얼마 전 등록한 피아노 교습소에서 받아 온 악보도 꺼내 봤다. 평소엔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던 음표가 어쩐지 더 생생하게 보였다. 악보 속 히사이시 조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가 스마트폰 음악 애플리케이션(앱) 없이도 재생되는 듯했다.

● 멍하니 한강 바라보니 잊고 살았던 친구 떠올라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오후 2시 30분. 오랜만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한강공원으로 산책에 나섰다. 평소엔 누워서 스마트폰을 하다 보면 어느덧 잠잘 시간이 돼 외출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휴대전화도, 이어폰도 없이 한강공원을 산책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산책하는 13명 중 9명은 노란 산수유나 새순이 올라온 나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챙겨 간 캠핑 의자에 앉아 멍하니 강물을 바라봤다. 햇살이 부딪혀 반짝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려니 놓쳤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특히 취업 이후 ‘축하한다’며 저녁을 사준 고마운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잘 있을까. 바쁘다는 핑계로 답례는커녕 연락도 제대로 못 했네.’ 기자는 도파민 단식 체험이 끝나면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오후 5시. 배달 앱을 열지 못하는 탓에 저녁도 직접 만들어 먹어야 했다. 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로 간단한 요리를 해서 배를 채우고 설거지와 빨래 등 간단한 집안일도 마쳤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7시. 이제 도파민 단식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다시 꺼낼 시간이 됐다. 어쩐지 아쉬웠다. 의미 없는 습관과 유혹을 인내한 대가로 집 청소, 건강식, 산책까지 마친 하루와 작별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온전한 나를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 작은 휴대전화 화면에서 한 발짝 멀어지면 가능한 일이었다.

● ‘디톡스 경험’ 찾는 현대인들

게티이미지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최근엔 1, 2시간이라도 도파민 단식을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전자기기 사용을 제한하는 공간도 인기를 얻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울 강남구 ‘욕망의 북카페’다. 이곳은 지난해 5월부터 내부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도파민 단식을 통해 책 읽기나 각자 해야 할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19일 오후 2시경 이 카페에선 손님 5명이 책을 읽고 있었다. 누구도 휴대전화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휴대전화는 모두 계산대 앞에 놓인 작은 철제 박스에 보관돼 있었다. 카페 안에 들어오기 전에 휴대전화를 맡겨 두는 것이 이 카페의 원칙이다.

초창기에는 항의나 반발도 컸다고 한다. 평일 기준 방문객 수가 하루 20명으로 대폭 감소하기도 했다. 디지털 디톡스(해독)가 유행하면서 지금은 방문객이 다시 느는 추세다. 평일에는 80명 넘게, 주말에는 그 두 배를 넘어 200명 가까이 방문하기도 한다.

손님들은 “짧은 시간이라도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며 방문 이유를 밝혔다. 한 달에 한 번 이 카페를 방문한다는 김영수 씨(43)는 “다른 북카페는 주변 이용객이 전부 동영상을 보고 있어 덩달아 집중이 안 된다”며 “이곳에서는 책에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권민경 씨(27)는 “2시간만이라도 집중해서 책을 읽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3개월째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 중인 권 씨는 “짧은 길이의 자극적인 영상 등을 보면 시종 불안하고 마음이 복잡해 일부러 하루 7시간 이상 휴대전화를 보지 않고 있다”며 “그러고 나면 책이나 영화 등을 볼 때 집중력이 상당히 높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 “도파민 단식, 짧게라도 꾸준히 시도하면 효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지난해 3월 발표한 ‘2022년 스마트폰 실태 조사’에 따르면 만 3세∼69세 스마트폰 이용자 중 23.6%가 과의존 위험군이었다. 이 중 만 10세∼19세 청소년 이용자의 과의존 위험군 비율은 40.1%로,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최근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된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등장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설립 청소년 기숙형 복합 치유 재활기관인 국립청소년디딤센터는 ‘인터넷·스마트폰 과의존 치유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과의존 청소년들은 캠프를 통해 정신의학 전문의와 전문 상담사가 함께하는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숲치료·놀이치료 등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외부활동도 제공된다.

전문가들은 영상 시청에 중독될 경우 우울 증세 등이 심각해질 수 있으며, 나이가 어릴수록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전했다. 또 단기적인 디지털 디톡스도 안정감이나 우울감 해소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중독 치료 전문가인 애나 렘키 미국 스탠퍼드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의 ‘보상’에 중독되면 뇌는 행복을 느낄 수 없어진다”며 “(도파민 단식을) 한 달은 꾸준히 시도하도록 환경과 규칙을 바꿔 보라”고 권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유튜브 ‘쇼츠’처럼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한 고자극 영상에 과잉 노출되면서 우울감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며 “단기적인 과잉 자극은 도파민 분비 체계 등 기분 조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했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쇼츠가 주는 자극이 100이라고 한다면, 자극이 사라질 경우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0’이 아닌 ‘―100’ 수준”이라며 “100만큼의 자극을 10개의 작은 자극으로 분산해 대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도파민 단식
일정 기간 전자기기나 커피, 술 등 자극적인 요소를 끊고 건강한 도파민 분비 패턴을 회복시키는 생활 양식. 쇼트폼 콘텐츠 등 자극을 끊는 것 못지않게 그것을 대체할 독서, 산책 등 건전한 자극을 충분히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유튜브#도파민 단식#휘발성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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