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병역브로커, 상담계약 취소 요청 의뢰인에 “법원 강제집행” 협박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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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허위진단 대가 거액 계약
의뢰인 “불법 안돼” 파기 요구하자
법원에 지급명령 신청해 소송 압박
법원 “계약 위법, 강제집행 불허”

검찰이 수사 중인 병역비리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병역브로커 김모 씨가 법원에 상담료 지급명령까지 신청하며 상담계약을 파기하려 했던 의뢰인들을 압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김 씨 등이 일단 계약서를 쓰면 ‘취소는 불가능하다’며 압박하는 방식으로 상당수 의뢰인들을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허위 뇌전증(간질) 진단서를 이용한 병역비리에는 프로 스포츠 선수와 연예인 등 최소 70명 이상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 “상담료 달라” 강제집행 신청하며 압박
8일 동아일보가 입수한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2021년경 군 입대를 앞둔 A 씨는 온라인에서 자신을 ‘국방 행정사’라고 소개한 김 씨의 광고를 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대 컨설팅’을 내세운 김 씨는 통화에서 “내가 군인 출신이라 어떻게 군 면제를 받는지 잘 안다. (A 씨가 사는) 광주까지 가서 상담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광주에서 A 씨를 만난 김 씨는 “뇌전증이라고 들어봤나. 뇌전증으로 2년 동안 치료받으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꺼냈다. A 씨가 “뇌전증이 없는데 어떻게 진단을 받느냐”고 묻자 김 씨는 “뇌전증 환자의 70%는 원인 없는 발작 증상을 보인다. 발작이 있다고 거짓말하면 된다”며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줬다.

당시 김 씨는 상담 수수료라며 “뇌전증 진단을 받으면 2000만 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A 씨가 망설이자 김 씨는 다른 계약서를 보여주며 “현역 의사도 1억 원에 같은 계약을 맺은 적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A 씨는 계약서에 서명했고, 뇌전증 검사 일정도 잡았다. 다만 불법일 수 있다는 생각에 실제로 검사는 받지 않았다.

얼마 후 김 씨는 A 씨에게 “검사를 받았느냐”고 물었고 A 씨는 “불법인 것 같아서 하지 않겠다”며 계약 파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김 씨는 “상담 수수료 2000만 원을 달라”며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다.

법적 지식이 부족한 A 씨가 대응하지 않는 사이 지급명령은 확정됐다. 이후 김 씨는 법원에 강제집행을 시도했고, A 씨는 뒤늦게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원에 강제집행 불허를 요청했다. 결국 법원은 “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는 민법 103조를 근거로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이 사건의 계약은 위법함에 따라 무효이므로 그에 근거한 지급명령과 강제집행 또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 검찰 “압박 때문에 가담했더라도 형사처벌”
서울남부지검과 병무청 합동수사팀은 병역비리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의 병·의원 기록을 확보하며 사실관계 파악에 집중하고 있다. 병원의 뇌전증 진단 및 치료 과정이 적절했는지 살피는 한편으로 복수의 현역 축구선수와 승마 볼링 등 다른 종목 선수, 래퍼와 법조계 인사 자녀 등을 대상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일부 의뢰인들은 김 씨의 압박에 못 이겨 계약을 이행했다고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OK금융그룹 프로배구단 소속인 조재성 선수도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압박해 병역비리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다만 검찰은 의뢰인들이 김 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병역비리에 가담했더라도 형사처벌을 피해 갈 순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의료계는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뇌전증 환자에 대한 편견이 커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한뇌전증학회는 5일 입장문을 내고 “이번 병역비리 의혹이 뇌전증 환자에 대한 역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병역면제 기준 강화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밝혔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병역브로커#뇌전증#허위진단#병역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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