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열 살 때부터 경성역에서 순사의 눈을 피해 김밥을 팔았다. 돈이 생겨 먹을 걸 사 먹었는데 너무 행복했다”며 “그게 너무나 좋아서 남한테도 주고 싶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이 행복을 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박 할머니는 “그 뒤로도 돈만 생기면 남에게 다 줬다. 나누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며 “그렇게 구십이 넘게 다 주면서 살다가 팔자에 없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이런 일이 있나 싶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방금 내밀어 주시는 손을 잡으니, 갑자기 어린 시절 제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귀한 분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박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당해 가족 없이 살다가 40년 전부터 길에 버려진 발달 장애인을 가족처럼 돌봤다고 한다.
남궁 교수는 “(박 할머니가) 고령이 되자 남은 것은 거동이 불편한 몸과 셋방의 보증금뿐이었다”며 “할머니는 셋방을 뺀 보증금 2000만원마저 기부하고 거처를 옮겨, 예전 당신이 기부해 복지 시설이 된 집에서 평생 돌보던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남궁 교수는 “할머니는 온전히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성자였다. 할머니가 청와대에 초청받아 영부인의 손을 붙들고 우는 장면은 어느 드라마 같았지만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팔십 년 전의 따뜻한 손을 기억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 그 손 때문에 모든 것을 남에게 내어주신 할머니, 옆자리의 영부인이 가장 크게 울고 계셨다. 그것은 압도적인 감각이었다”고 평했다.
남궁 교수는 “그 자리의 많은 사람 또한 치열한 선의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여전히 ‘높은’ 무엇인가가 있었고, 앞으로도 일정 지위의 삶을 영위할 것이 분명했다”며 “하지만 할머니는 그 따뜻한 손을 나눠주기 위해 자신이 얻은 모든 일생을 조용히 헐어서 베풀었다. 구순이 넘는 육신과 이미 모든 것을 기부했다는 사실만큼 당신을 완벽히 증명하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끝으로 남궁 교수는 “그 패배가 너무 명료해 ‘봉사’라는 명목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떤 한 생은 지독하고도 무한히 이타적이라 무섭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것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직면했을 때 경험하는 경배일 것”이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청와대에서 조우한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높은 사람들도 번듯한 회의도 아니었다. 범인으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영혼이 펼쳐놓는 한 세계였다”고 글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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