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불나방처럼 본능 끌려 범행…경찰 보여주기식 수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일 21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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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1시 반 수원지법 501호 법정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이춘재(57)가 들어섰다. 이춘재가 23세였던 1986년 경기 화성시에서 처음 살인을 저지른 지 34년 만이다. 청녹색 수의를 입고 증인석에 선 이춘재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30여 년 전 몽타주 사진과 흡사했다. 이날 이춘재는 자신의 8번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간 복역했던 윤성여 씨(53)가 청구한 재심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가 저지른 14건의 연쇄살인은 모두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하다.

● “불나방처럼 본능에 끌려 범행”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박정제) 심리로 열린 이날 재판에서 이춘재는 1989년 9월 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 화성과 청주에서 모두 14건의 살인과 34건의 강간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자백한 것에 대해 “내가 진범이 맞다”고 증언했다.

윤 씨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이춘재가 1988년 ‘8번째 사건’ 관련 경찰 재수사 과정에서 직접 그린 범행 장소 약도와 당시 피해자 집 구조 영상을 제시하며 당시 상황을 묻자 차분한 목소리로 상세히 답변했다. 이춘재는 “당시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양말을 벗어 손에 끼고 범행을 저질렀다”며 “피해자의 속옷은 벗긴 뒤 범행 뒤처리에 사용하고 사망한 피해자에 새로운 속옷을 입히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춘재는 “목을 조르는 위치가 비슷한 위치에 항상 같은 곳을 누르게 된다”며 손을 들고 목을 조르는 방식을 시연하기도 했다.

이춘재에는 피해자들을 스타킹 결박하고 속옷 등으로 재갈을 물린 이유에 대해선 “결박은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재갈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며 “머리에 속옷을 뒤집어씌운 것은 나를 못 보게 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이춘재에게 피해자 중 9세, 13세 여성이 포함된 점 등을 지적하며 연쇄살인을 저지른 동기가 무엇인지를 여러 번 물었다. 그때마다 이춘재는 “그냥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멈추면 강간이 되고 진행되면 살인이 되는 것”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이춘재는 “어떤 계획이나 생각을 갖고 한 것이 아니라 불을 찾아가는 불나방처럼 본능에 끌려 범행을 저질렀다. 그냥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그런 행동을 하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이춘재는 이어 “(범행 후)후회는 항상 했지만 순간적으로 ‘또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찰나의 생각일 뿐이었다”며 당시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박 변호사는 증인신문 도중 이춘재가 저지른 14건의 살인사건 현장 사진들을 법정 안 대형화면에 띄우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최후 모습과 각종 증거 사진들이 슬라이드 형식으로 제시되는 약 5분 동안 이춘재는 시선을 화면에 또렷이 고정한 채 미동도 없이 바라봤다.

● “당시 경찰 보여주기식 수사”
이날 재판에서 이춘재는 범행 당시 경찰 수사의 허술함에 대해서도 상세히 증언했다. 이춘재는 “검문을 받다가 파출소까지 불려간 적이 있었지만 용의선상에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며 “들킬만한 계기가 몇 번 있었는데 (나를 왜 못 잡았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춘재는 피해자가 당시 소지했던 시계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경찰에서 “길에서 주웠다”고 말해 바로 풀려났다고 했다. 또 “수사가 제대로 진행됐다면 (자신을)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며 “경찰이 수백 명씩 왔다 갔다 했지만 ‘보여주기 식’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춘재는 경찰이 지난해 이춘재가 있던 부산교도소로 찾아왔을 때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박 변호사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여성 프로파일러에게 손을 한 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던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손이 예뻐 보였다. 손이 예쁜 여자가 좋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춘재는 재판 말미에 “저의 사건에 관계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다”며 “반성하고 있고, 그런 마음에서 자백했다. 하루속히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을 지켜본 윤 씨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이춘재가 법정에 나와 진실을 말해준 것은 고맙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다”며 “다만 그가 진실을 말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수원=이경진 기자 lkj@donga.com
수원=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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