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목소리로 “03시에 평택요”…서울로 향한 車안 그녀는[히어로콘텐츠/증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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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3> 돕는 자와 찾는 자

증발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완벽하게 증발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작정하고 증발해버린 사람을 찾는 일 역시 만만치 않다. 증발자를 애타게 찾는 지인들을 위해 누군가 추적에 나서기도 한다. 증발자를 둘러싼 조력자와 추적자, 은밀하게 꿈틀대는 ‘증발 생태계’를 들여다봤다.


증발자 상당수는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자취를 감춘다. 누군가가 증발하면 이들을 찾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실종신고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한 경찰은 “마음먹고 숨어든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귀띔했다. 증발하는 사람들, 증발자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증발 해결사’에게로 향한다. 증발을 돕는 업체부터 탐정까지…. 증발자를 둘러싼 이들은 은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증발 돕는 업체들
사연 물어보는건 절대 금지
행선지 알리지 않는것도 철칙
대부분 자정부터 새벽까지 작업
이사비 2배지만 문의 끊이지않아


‘도니용달’ 대표 고모 씨가 용달차량에 짐을 싣는 모습. 그는 급하게 몸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종종 문의나 의뢰를 한다고 했다.
‘도니용달’ 대표 고모 씨가 용달차량에 짐을 싣는 모습. 그는 급하게 몸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종종 문의나 의뢰를 한다고 했다.

1. 이유를 묻지 말 것.

2. 제3자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말 것.

3. 신속·은밀하게 움직일 것.

누군가의 증발을 돕는 이들에게 이 세 가지 규칙은 불문율이다. 신상이나 사연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증발할 시간과 장소면 충분하다. 취재팀이 접촉한 증발 조력 업체 10곳은 하나같이 “질문은 금물. 의뢰인을 모시고 사라질 뿐”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도 야반도주 업체는 있었다. 경제가 출렁이면 이런 업체들이 반짝 성업을 이뤘다. 최근에는 20∼40대 젊은층의 의뢰가 늘고 있다. 증발 착수 시간은 0시∼오전 6시에 집중된다. 행선지는 전국 구석구석. 거리, 짐, 필요 인원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일반 이사비의 1.5∼2배 시세다.

이사업체 ‘쉐어워크’ 대표는 “고객이 ‘빨리 와 달라’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지려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우리도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A용달업체 대표는 “의뢰인들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1t 소형 트럭을 선호한다. 여기에 못 싣는 짐들은 폐기 비용을 따로 주면서 ‘없애 달라’고 한다”고 전했다.

‘도니용달’ 고모 대표(41)는 2년 전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앳된 목소리의 여자가 떨면서 “내일 오전 3시에 경기 평택시로 와 줄 수 있느냐”며 빌딩 이름만 달랑 알려줬다. 용달업체 운영 6년 만에 이런 의뢰는 처음이었다. 고 씨가 접선 장소에 가니 한겨울 밤 얇은 치마 차림의 여성이 어두운 구석에 서 있었다. 여성을 태우고 집으로 가 조용히 짐을 챙겼다. 목적지인 서울 영등포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여성이 처음으로 정적을 깼다. “업소에서 돈을 안 줘서 다른 언니들은 벌써 도망갔어요. 누가 저 찾으면 인천으로 갔다고 해주세요.”

업체들은 증발을 처리하다 보면 왜 사라지려 하는지 짐작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사연을 묻지 않는다. 증발자 뒷정리까지 해본 B심부름업체 대표는 “배경이나 사연에 아예 눈을 감아야 안 다친다”고 했다.

남겨진 가족이나 애인 등이 증발자를 찾아다니다가 폐쇄회로(CC)TV에 찍힌 차량번호 등을 추적해 용달업체나 이사업체로 연락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업체가 행선지를 알려야 할 의무는 없다. 이들에게는 보안 유지가 생명이다.

증발 조력자들도 증발자를 애타게 찾는 이들을 외면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입을 열었다가는 증발자가 다칠 수도 있다. 용달차를 모는 C 씨가 겪은 경우가 그렇다. 2013년 추운 겨울밤 20대 여성을 태우고 내달린 적이 있다. 점잖은 목사 부부의 딸인데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찌검에 시달렸던 것. 20대 중반에 부모에게 “독립하겠다”고 했다가 더 혹독한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부모가 모두 집을 비운 어느 날 재빨리 옷 몇 벌과 겨울 이불 한 채만 챙겨 증발한 그 여성을 위해 C 씨는 끝까지 행선지를 함구하고 있다.

증발 흔적 찾는 탐정
옛 주소-사진 한장 들고 탐문나서
꼬박 이틀 걸쳐 겨우 실마리 찾기도
못찾는 성인이 미아보다 많아
가족-지인 고통 덜기 도움 됐으면…


민간 조사업체 ‘더서치’의 최환욱 대표가 증발자를 찾기 위해 한 건물의 우편물을 훑어보는 모습. 그는 “가족, 동료들의 증언과 단서를 종합해 증발자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했다.
민간 조사업체 ‘더서치’의 최환욱 대표가 증발자를 찾기 위해 한 건물의 우편물을 훑어보는 모습. 그는 “가족, 동료들의 증언과 단서를 종합해 증발자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했다.

2019년 여름 민간 조사업체 ‘더서치’의 최환욱 대표(31)는 “어머니를 찾아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딸은 어린 시절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 대표를 찾았다고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엄마니까’.

15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버지와 다툼이 심했던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은 채 사라져 가족관계증명서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추적할 단서는 많지 않았다. 한참 전 어머니가 전입신고를 했던 주소지가 전부였다.

최 대표가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다른 이가 살고 있었다. 직원들과 탐문에 나섰다. 주소지 인근 슈퍼마켓, 세탁소, 식당 등을 온종일 훑으며 의뢰인 어머니의 사진과 이름을 들이밀었다. 꼬박 이틀을 매달린 결과 드디어 사진 속 인물을 알아본 이가 나타났다. “근처 저 건물로 이사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또 무작정 찾아갔다. 빈집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 확실했다. 건물 앞에 차를 대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화장실도 안 가고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사진 속 인물과 닮은 사람이 차 앞을 스쳐 갔다. 재빨리 다가가 딸의 이름을 외쳤다. 얼마 뒤 모녀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최 대표는 “우리 일이라고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라며 “증발자의 이름, 사진, 옛 주소를 알면 괜찮은 조건”이라고 했다.

최 대표 같은 이들이 ‘탐정’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내걸고 증발자를 찾을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됐다. 올해 2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8월 5일부터 탐정으로 영리 활동을 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간 ‘민간조사원’ ‘생활탐색사’ ‘흥신소’ 등의 이름을 쓰던 이들은 본격적으로 탐정 활동을 하고 있다. 하금석 대한민간조사협회장은 “현재 탐정들은 불법적 수단을 쓰는 일부 업종과 달리 발로 뛰며 탐문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을 돕는다”고 했다.

하지만 탐정 활동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탐정들이 많이 하는 민형사 사건 증거 수집 활동, 잠적한 불법 행위자의 소재 파악 등은 여전히 제한된다. 성인 실종자들을 찾는 ‘전국가출인찾기운동본부’ 대표이자 탐정으로 활동 중인 서영근 씨는 “보통 ‘미아’에 관심이 많은데, 현실에서는 찾지 못하는 아이보다 성인이 더 많다”면서 “증발자로 인해 지인들이 받는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도 탐정의 활동 폭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나락으로 내몰려… 스스로를 삭제한 사람들
우발적 가출-범죄 연루와 달라… 상처 등 쌓이며 자발적 단절 선택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인생이란 언제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뻗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은 실패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존엄성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벼랑 끝으로 밀려 추락하기 직전이지만 거리로 나가 구걸하며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럴 때 누군가는 생각한다.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여기, 정말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는 이들이 있다. 홧김에 집을 나가는 가출이 아니다. 범죄나 사고에 연루돼 숨거나 숨겨진 것도 아니다. 증발은 자발적인 의지로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이웃, 동료 등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삭제하는 일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선 ‘증발’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을 채우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사라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생긴 멍은 시간이 갈수록 크고 진해진다. 이들 주위에는 증발하려는 자를 돕는 이가 있는가 하면 증발한 자의 뒤를 쫓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완벽히 증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에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한 증발자와 그 가족들은 묻는다.

“당신, 정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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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1> 세상을 등지고 증발을 택하다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1

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2> 증발자들의 공간, 미래고시텔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2

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3> ‘증발’ 돕는 자와 찾는 자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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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사 취재: 김기윤 이호재 사지원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양회성 이원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성규 이샘물 기자
▽디지털 제작: 배정한 윤수미 이현정 김수영 윤태영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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