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의 굴레… 욕 먹어도 불수능 선택하는 속사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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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능 동점 많아 1등급 4% 넘으면 “상위권 변별력 없다” 비판 쇄도
공개적으론 “학교공부로 풀 수준”, 실제론 어렵게 출제해 등급별 안배
올해도 킬러문항-긴 지문 쏟아져

역대급 불수능으로 꼽히는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 시험지(위쪽 사진)와 최고 물수능으로 불리는 2001학년도 
언어(국어)영역 시험지. 2001학년도에는 보기에 만화와 캐리커처가 등장했고 내용도 쉬운 짧은 지문이 주를 이뤘다. 올해는 
시험지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문과 문제가 길고 고난도 질문이 연이어 등장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역대급 불수능으로 꼽히는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 시험지(위쪽 사진)와 최고 물수능으로 불리는 2001학년도 언어(국어)영역 시험지. 2001학년도에는 보기에 만화와 캐리커처가 등장했고 내용도 쉬운 짧은 지문이 주를 이뤘다. 올해는 시험지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문과 문제가 길고 고난도 질문이 연이어 등장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공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준이라고요? 웃음만 나와요.”(수험생 조모 양)

“대학 공부에 이런 문제를 푸는 능력이 왜 필요한가. 지극히 채점 편의주의적이다.”(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15일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두고 출제방식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이 뜨겁다. 수능이 ‘속도전이 돼버렸다’는 비판은 이미 2000년대부터 나왔다. 10년 전에도 ‘공부 좀 하는 학생이라면 수능 수학 1번부터 4번까지는 1분 안에 풀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3년간 ‘불수능’(어려운 수능) 기조 속에 수학뿐 아니라 국어마저 교사들도 풀기 어려운 ‘킬러 문항’ ‘꽈배기 문제’가 쏟아지자 수험생의 울분이 극에 달했다는 분석이다.

○ ‘4% 함정’이 낳은 불수능의 ‘늪’

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매년 수능 당일 시험 시작 직후 수능 출제방향을 발표한다. 이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춰 출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험생 배모 씨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 걸 내놓고 매번 고교 수준이라고 한다”며 “주어진 시간이나 킬러 문제의 형태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이번 수능에서 수험생들은 국어 시험지 16장에 나온 45개 문제를 80분 만에 풀어야 했다. 한 문제에 주어진 시간은 107초 정도다.

입시 전문가들은 “수능은 결국 대입 선발을 위한 도구”라며 “변별력이 없으면 수능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분석했다.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약자)로 대변되는 서열화된 대학 구조에 맞게 등급을 끊어주려면 속도전이 관건인 ‘이상한 문제’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교육계에서는 수능 채점 뒤 등급 구분 결과 기준보다 너무 많아지면 ‘실패한 출제’로 본다. 서열화된 대학 구조에 맞게 수능 점수도 서열화돼야 하는데 그 구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대평가 체제에서 수능 1등급은 표준점수 상위 4%를 기준으로 한다. 동점자가 너무 많아지면 4% 선이 무너진다. 지난해 수학 ‘나’형은 동점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1등급이 7.68%가 나와 ‘문제 설계를 잘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절대평가 체제인 영어도 1등급(90점 이상)이 10.03%로 ‘너무 많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평가원은 “등급 컷을 고려해 출제하진 않는다”고 밝혔지만 입시업계에서는 출제진이 킬러 문항의 난도와 개수를 조절한다는 게 정설이다.

○ 수능 역사 길어질수록 불수능 우려

‘킬러 문항’ 없이 수능을 정말로 고교 수업 수준에 맞춰 내는 것은 교육부와 평가원에 상당한 부담이다. 25년 수능 역사상 최고 ‘물수능’(쉬운 수능)으로 꼽히는 2001학년도 수능은 많은 학생이 풀 수 있었던 ‘착한 수능’이었다. 하지만 그해 입시는 대혼란에 빠졌다. 수능 만점자조차 서울대에서 탈락했고 400점 만점에 390점을 맞고도 ‘SKY’ 지원을 불안해하는 분위기였다.

수능 역사가 길어지고 불수능 기출문제가 쌓일수록 수능이 고교 수준에서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교육평가연구소장은 “평가원으로서는 욕을 먹더라도 물수능보다는 불수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수능에서 2001년 난이도를 다시 기대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불수능 선택#킬러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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