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횡단 여대생에 사고책임? 80㎞로 달린 SUV, 60㎞로 달렸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7일 16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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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늦추면 사람이 보인다”

지난달 20일 0시 50분경 광주 서구 쌍촌동 도로에서 여대생 A 씨(23)와 B 씨(23)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치였다. A 씨는 숨졌고 B 씨는 부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 장면이 담긴 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사고 당시 두 여대생은 왕복 9차로 도로를 막 건너던 중이었다. 문제는 무단횡단이었던 것이다. 일부 누리꾼은 영상 속에서 SUV는 규정속도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며 두 여대생의 사고책임을 지적했다. ‘무단횡단 처벌을 강화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까지 등장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경찰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당시 SUV가 시속 80㎞ 이상으로 달린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해당 도로 구간의 제한최고속도인 시속 60㎞를 20㎞ 이상 초과한 과속이었다. SUV 운전자는 “사고 구간의 가로등 불빛이 약해 도로가 어두웠다. 뒤늦게 A 씨를 발견해 운전대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SUV가 규정속도를 지켰어도 무단횡단 여대생을 피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시속 60㎞ 이하였다면 피해자가 숨지는 건 막았을지도 모른다.

● 사고는 못 피해도 사망은 피할 수 있다

서울 강동구에는 둔촌동을 가로지르는 ‘진황도로’가 있다. 왕복 2차로 도로다. 하지만 천호대로와 올림픽로 같은 주요 간선도로와 이어져 낮에 교통량이 많다. 특히 천호대로에서 중앙보훈병원 앞까지 이어지는 484m 구간 주변은 저층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그래서 제한속도가 시속 40㎞다. 시속 30㎞로 제한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도 2곳이나 있다.

교통량이 줄어드는 밤이면 이곳의 제한속도는 무용지물이 된다. 시속 40㎞는 최저속도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횡단보도 3곳 중 2곳은 신호등이 없다. 120m 간격을 두고 스쿨존 2곳이 있다보니 제한속도가 시속 30㎞와 40㎞를 ‘널뛰기’한다. 운전자가 정확한 제한속도를 알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속도 관리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주민 이수정 씨(29·여)는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없다보니 밤에는 빠르게 달리는 차량을 피해 길을 건너는 게 어렵고 무섭다”고 말했다.

25일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1년부터 5년간 국내 교통사고의 71.9%, 교통사고 사망자의 48.6%가 도시지역 도로에서 발생했다. 또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보행자 비중은 좀처럼 40%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도시지역 보행자 보호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국내 도시의 속도정책은 보행자보다 차량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진황도로 같은 도로는 보행자 통행이 잦은 생활도로다. 주거지역이라 어린이와 고령자 등 교통약자의 통행이 많다. 이 같은 보행안전 사각지대는 진황도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주간에는 교통정체와 신호지체로 인해 차량의 통행속도가 낮아진다. 반면 야간에는 교통량이 적어 평균 통행속도와 과속차량 비율이 높아져 사고위험이 높아진다. 2016년 전체 보행 사망자 중 62%인 1062명이 야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54%는 차도 폭 9m 미만 도로에서 숨졌다.

● ‘안전속도 5030’ 본격 추진

차량과 충돌했을 때 보행자 피해는 차량 속도와 비례해 급증한다. 교통안전공단 실험에서 시속 30㎞ 차량과 보행자가 충돌했을 경우 보행자의 중상 가능성은 15.4%였다. 시속 50㎞에서는 72.7%, 시속 60km에서는 92.6%로 급격히 증가했다.

반대로 속도를 시속 10㎞만 줄여도 보행자를 살릴 가능성은 커진다. 지난해 캐나다 위니펙시 경찰의 차량 속도별 제동거리 실험 결과 시속 60㎞로 달리던 승용차 제동거리는 27m. 반면 시속 50㎞에서는 18m에 그쳤다. 속도를 시속 10㎞ 줄이면 전방 18m에서 27m 사이의 보행자를 더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시속 30㎞일 때의 제동거리는 6m에 그쳤다. 시속 40㎞에서의 제동거리 11m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도 보행자 보호를 위해 도시의 차량 속도를 줄이는 정책을 전면 추진하고 있다. 시속 60㎞이던 도심 간선도로 제한최고속도를 시속 50㎞으로, 생활도로는 시속 30㎞로 낮추는 ‘안전속도 5030’ 정책이다.

경찰청은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빠르면 연말 개정해 도시지역 도로 기본속도를 시속 50㎞로 낮춘다. 제한최고속도 표지판이 별도로 없는 도로에서는 시속 50㎞을 제한속도로 둔다는 의미다. 시속 50㎞를 기준으로 도로 기능에 따라 제한속도가 차등 지정된다. 진황도로의 사례에서 드러난 속도 관리 정책의 허점도 개선한다. 국토교통부와 경찰은 12월까지 도시 도로 설계 및 속도하향에 관한 통합 기준을 마련할 방침이다.

최병호 한국교통안전공단 교통안전연구처장은 “차로 수를 줄이거나, 과속방지 시설을 마련하는 등 속도를 자연스레 줄일 수 있는 도로 설계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형석기자 skytree08@donga.com
광주=이형주 기자peneye09@donga.com

▼ 속도하향 선진국 스웨덴 ▼

2008년 스웨덴은 ‘안전속도 5030’ 정책을 시행했다. 한국보다 정확히 10년 빨랐다. 동시에 지방자치단체 209곳에 차량 속도정책 수립 및 추진 권한을 맡겼다. 지역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지자체가 책임 있게 정책을 추진하라는 뜻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스웨덴 교통사고 사망자는 2011년 319명에서 2015년 259명이 됐다. 2015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는 2.7명이다. 한국(9.13명)의 29.5%에 불과하다.

최근 방한한 스웨덴 국립도로교통연구소 안나 바베디 박사는 “지자체 중심의 속도 정책이 속도 줄이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17일 제주에서 열린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바베디 박사는 중앙정부의 속도정책이 지자체로 이양되면서 지역 특색에 맞는 정책 시행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앙정부는 기준 정도만 만들고 지자체가 이동성과 접근성 환경 등을 고려해 제한속도를 정했다”고 밝혔다.

물론 지자체가 제한속도를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속도 상향은 하향보다 까다롭게 했다. 중앙분리대 설치가 필수인 도로의 상향 조건은 더 엄격하다. 해당 도로 구간에 보행자 통행이 적거나 거의 없는 걸 입증해야 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안전 때문이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국가교통안전연구센터장은 “어느 나라나 도로를 닦을 때 이동성을 먼저 고려하지만 스웨덴은 의도적으로 속도를 내기 어렵게 차로 수를 줄이는 등의 정책을 펼쳐 효과를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한속도를 낮추면 통행시간이 늘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일부 운전자가 안전속도 5030 정책에 반발하는 이유다. 하지만 바베디 박사는 “실제 측정을 하면 시속 60㎞를 시속 50㎞로 줄여도 소요시간이 크게 늘지 않는다. 시속 50㎞에서 40㎞으로 낮춰도 통행속도는 고작 시속 2~3㎞ 밖에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한국교통연구원 실험 결과에서도 시속 60㎞에서 10㎞를 낮추면 통행속도는 1.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차량통행이 많은 도시에서는 신호체계가 속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오히려 정속운행이 통행시간 단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가장 중요한 건 운전자의 동참이다. 스웨덴은 버스와 화물차 같은 사업용 차량에는 강제로 속도제한장치를 부착하도록 했다. 사고가 줄수록 운송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걸 적극 홍보했다. 최병호 한국교통안전공단 교통안전연구처장은 “유럽은 제한속도를 어기는 차량 비율이 30%를 넘으면 해당 도로의 속도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며 엄격한 속도 관리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바베디 박사는 “스웨덴 정부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감소시킨 현 속도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이다. 교통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과 홍보도 더욱 활성화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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