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광주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된 대중 집회였다. 박관현 열사는 성회에서 뛰어난 연설과 리더십으로 광주의 아들로 떠올랐다. 나경택 촬영
박관현 열사는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옛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통해 ‘광주의 아들’이 됐다. 박 열사의 꿈은 법조인이었다. 들불야학 교사를 하면서도 법전을 놓지 않았다. 들불야학 후배 서대석 씨(58)는 “야학을 하던 1979년 10월경 형은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법대 도서관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대부분 과목을 A+ 학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학생운동권 선후배들이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알고 전남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추천하자 법조인의 꿈을 잠시 미뤘다. 민주화라는 시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했다. 1980년 4월 9일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뒤 어용교수 퇴진 등 학원민주화운동을 한 달간 펼쳤다. 그의 리더십에 학생들은 단결했고 5월 8일 교내에서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렸다.
당시 상황은 권력욕을 서서히 드러내는 신군부에 맞서 학생운동권의 투쟁 열기가 고조되던 폭풍전야의 시기였다. 학생들은 교내 성회 마지막 날인 5월 14일 광주시내로 진출했다. 옛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시민들은 집회에서 ‘박관현’을 연호했고 박 열사는 “제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라며 연단에 올랐다.
박관현 열사는 검정고무신과 염색한 군복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소탈했다. 법학개론 등 전공노트가 가득 들어있는 그의 가방은 작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그는 연설을 하면서 민주화의 열망을 토해냈다.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도 낭독했다. 성회가 끝나면 학생들과 새벽까지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기도 했다. 사흘간 평화시위와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광주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5·18의 숨은 의인’인 고 안병하 전남도 경찰국장과 협의해 16일 횃불행진을 비폭력으로 진행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학생 집회에 시민이 대거 참여한 것은 광주가 유일했다. 박 열사는 성회가 끝날 무렵 “비상계엄이 강화되면 학생들은 오전 10시 대학 교문에서, 시민들은 정오 전남도청에서 만나 투쟁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강화하고 전국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했다. 전남대 학생들은 이날이 일요일이지만 오전 10시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학생들은 저항하다 시내로 후퇴했고 여기에 시민들이 가세했다. 시민들은 금남로 등지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싸웠다. 성회에서 타오른 민주화 횃불이 5·18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박 열사는 18일 새벽 담을 넘어 학교에 들어갔다. 캠퍼스는 계엄군 천지였다. 학교를 빠져나온 박 열사는 오전 8시 광천동에 있는 들불야학에서 윤상원 열사와 만났다. 전날 밤부터 신군부가 전국 민주인사들을 싹쓸이 연행하자 재야가 우왕좌왕할 때다.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회장이던 김영휴 씨(63)는 “그 자리에서 윤상원 선배가 박 열사에게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몸을 피하라고 했다”며 급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박 열사는 전남 여수로 몸을 숨겼다가 서울 남동생 집으로 갔다. 친척집에서 1년간 은신하며 소금과 모기장을 팔았다. 제수인 유봉순 씨(63)의 소개로 서울 한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은신 도중 5월의 참상을 알고 괴로워했다. 박 열사는 유 씨에게 “더 큰일을 하기 위해 몸을 피했는데 5·18 때 같이 있지 못한 것이 한이다. 차라리 광주에서 싸우다 죽겠다”며 자책했다고 한다.
1982년 4월 5일 공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그는 TV에 자신의 사진이 나오는 것을 봤다. 수사당국이 5·18 수배자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들의 얼굴을 공개했던 것이다. 박 열사는 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식사를 마치고 묵묵히 일하러 가다 경찰에 붙잡혔다. 박 열사는 서울에서 광주로 이송되던 중 유 씨가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죄인도 아닌데 왜 피하느냐. 죄인은 바로 신군부다. 5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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