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의 상징인 전주 한옥마을. 전라도는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당시 호남의 큰 고을이었던 전주와 나주의 첫 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전라도는 변방의 줄기찬 생명력으로 지나온 천년을 살아왔다. 전주시 제공
전라도는 붉은 황토 빛이다. 가도 가도 나지막한 구릉들이 붉은 허리를 내놓은 채 아슴아슴 펼쳐있다.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 한여름 땡볕엔 붉은 황토 기운이 이글이글 타올라 뱀 혓바닥처럼 온 몸을 휘어 감는다. 오죽하면 한하운 시인(1919∼1975)이 ‘천리 먼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라고 말했을까.
김화성 전 동아일보 전문기자전라도 사람들은 그런 황토 땅에서 수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전라도라는 이름이야 올해로 딱 천년이 된다지만 그 땅의 붙박이 생명들은 ‘이름보다 훨씬 먼저 흙과 어우러져’ 살았다. 붉은 황토에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새끼들의 뼈를 돋우고 살을 찌웠다. 굶주린 백성의 배를 불렸고 국가재정의 3분의1을 책임지며 나라의 곳간을 채웠다. 하지만 국가는 오직 전라도 땅의 생산물만 필요했을 뿐 그 땅의 인물들은 중히 쓰지 않았다. 아니 그곳은 ‘반역의 땅’이라며 전라도 인재들에 대해서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전라도는 천년동안 늘 변방이었다. 1018년 고려 현종이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자를 따서 8도(道) 중 처음으로 전라도라고 이름 지은 것도 결코 전라도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3차 침입을 맞아 바람 앞의 등불신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2차 침입 때 현종 임금은 나주까지 피란길에 올랐다가 갖은 고생을 한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전주에서 7일 동안 머무르며 겪었던 수모는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고려 건국 80여 년이 지났지만 전주는 여전히 후백제의 반란기운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결국 현종은 전주를 비롯한 지방 호족세력의 장악과 피란시절 직접 눈으로 봤던 곡창지대 전라도의 생산력 확보를 위해 행정조직 정비가 시급했다. 그래야 거란과의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조직 정비이후 296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로 경상도가 생긴 것을 보면 그때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1019년 마침내 강감찬 장군은 귀주대첩으로 거란족을 크게 물리쳤고 현종은 탄탄대로를 걸으며 고려정부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었다.
전라도 3개 시도(전북·전남·광주광역시)가 정한 전라도 천년나무는 느티나무다. 일명 ‘해를 매달아 놓았던 나무’이다. 해남 대흥사 뒤편의 두륜산에 천년이 넘도록 묵묵히 서 있다. 높이 22m, 둘레 9.6m. 어른 예닐곱이 두 팔을 벌려야 닿을 정도로 품이 넓다. 대흥사 뒤쪽 두륜산은 영락없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두륜봉이 부처님 머리, 가련봉이 부처님 가슴, 노승봉이 부처님 손, 고계봉이 부처님 발의 형상이다. 전라도 천년나무는 바로 부처님가슴 형상의 가련봉 아래 만일암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옥황상제의 천동과 천녀가 이 느티나무에 해를 매달아 놓고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과 남미륵암의 마애여래입상을 조각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여래상은 곧 현생을 주관하는 석가모니부처를 뜻한다.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와 전남 화순 운주사 일대는 바로 전라도 중생들의 미륵부처에 대한 간절함이 배어있는 곳이다. 모악산 아래에는 ‘오리알터’로 불리는 저수지 ‘올(來)터’가 있다. 누가 오는가. 바로 미륵부처가 온다는 뜻이다. 아직도 이 주위에는 미륵계통의 신흥종교가 몰려있다. 역시 이곳에서 조선시대 혁명아 정여립(1546∼1589)이 서른아홉 때 한양의 벼슬을 버리고 터를 잡고 살았고 강증산(1871∼1909)은 정여립 집터 바로 옆 구릿골에 약방(광제국)을 차려놓고 여성, 백정, 무당, 광대가 존경받고 서자와 상민이 무시당하지 않는 후천개벽의 세상을 역설했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도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감수성 많은 청소년시절을 보내며 김덕명과 손화중을 평생 동지로 사귀었다. 화순 운주사는 ‘1000개의 부처와 1000개의 탑을 만들면 미륵부처님이 내려 오신다’는 전설의 현장이다. 골짜기 안에는 중생들이 투박하게 빚어놓은 못난이 돌부처들이 아직도 개벽의 세상을 꿈꾸며 서있다.
전라도는 이 땅의 역사에서 ‘야지(野地)’임에 틀림없다. ‘들판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땅, 벌판이 가장 많은 땅, 때로는 들불처럼 타오르며 석양을 벌겋게 물들였고 가끔은 ‘변방의 우짖는 새’로서 그 서러움에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사물놀이처럼 시끄러운 듯 황홀하고 무질서한 듯 어우러지며 옹골지고 신명나게 살았다. 그 속엔 변방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정신이 녹아있다. 드넓은 김제만경·나주 들판의 평등정신과 짠한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대동정신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은 전라도 천년의 소중한 주춧돌이다.
사실 전라도 천년의 구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거의 없다. 19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전라도는 어디까지나 주변부였다.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 서울의 달동네에 자리 잡았고 젊은이들은 공돌이 공순이로 공장에 나가야 했다. 공부깨나 했다고 다를 것은 없었다. 서울에 올라가 명문대 나오고 고시를 패스해도 끝내는 권력의 주변부에서 떠돌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결국 고향엔 늙은 부모와 누렁이만 남아 선산을 지켜왔다. 만약 이런 패러다임이 계속된다면 전라도 새천년이라고 해봐야 바뀔 여지는 거의 없다. 결국 판을 바꿔야 한다는 애기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시대이다. 전라도 사람들의 활달한 정신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안성맞춤이다. 새판을 짜고 불판을 전면적으로 갈아엎는데 적격이다. 자고나면 휙휙 바뀌는 세상.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살 수 있다. 천년동안 변방이었던 전라도에 둘도 없는 기회다. 전라도는 생명자본의 땅이다. 생명을 키우는 너른 들판과 바다 그리고 수많은 섬들이 바로 그 현장이다. 거기에 전라도 사람들의 줄기찬 생명력과 자유스러운 영혼이 어우러지면 개벽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힐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전통정원과 영국 디자이너 찰스쟁스의 ‘호수정원’이 있는 대한민국 대표 정원 순천만국가정원.중심은 썩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고 움켜쥐고 지키려고만 하니까 딱딱해진다. 변방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인다. 변화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부드럽고 관대하다. 중심에 눈치 보지 않는다. 당당하고 전혀 꿀리지 않는다. 열등감 같은 건 조금도 없다. 이젠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켜켜이 아리도록 쌓였던 붉은 마음이 들꽃이 되어 하나둘 자연스럽게 피어날 때인 것이다. 바로 지금 그 변방 전라도 땅에 꽃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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